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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OR‘S CHOICE

컬렉터 김활란과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글 이광표

이화여대 박물관은 수준 높은 컬렉션을 자랑한다. 이화여대 박물관 컬렉션 가운데에서도 단연 압권은 국보 107호 〈백자철화포도무늬 항아리〉(白磁鐵畵葡萄文壺, 18세기 전반)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철화백자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항아리. 육중하고 당당한 어깨에서 몸통으로 내려오는 곡선은 우아하면서도 날렵하고, 철화로 그려 넣은 두 가닥의 포도 줄기는 생생하면서도 그윽하다. 특히 표면의 포도 그림은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순수 회화작품 못지않은 품격이다. 포도나무 잎의 적절한 농담(濃淡), 살아있는 듯 섬세하게 이어진 줄기, 싱그럽게 윤기나는 포도송이. 조선시대 전체를 통해 백자 항아리에 등장한 포도무늬 그림 가운데 회화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포도그림은 도공이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도공의 그림 치고는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다. 18세기에 활약하던 당대의 뛰어난 전문 화원(畵員)이 심혈을 기울여 그렸을 것이 틀림없다.
포도 그림 자체도 대단하지만 화면 구성, 즉 여백 처리도 매력적이다. 맨 위 아가리 부위 바로 아래에서 몸체의 상반부까지만 포도나무를 그려 넣고 하반부를 완전히 비워놓아 여백을 시원하게 살렸다. 항아리의 모양과 여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공간 구성이다.
이 포도무늬 항아리는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광복 직후였다. 일제강점기 이 항아리의 소장자는 당시 용산 철도국 철도기사(공무과장)였던 일본인 시미즈 고지(淸水幸次)였다. 그는 한국 고미술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고지는 수 십여 점의 한국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이 항아리를 특히 아꼈다고 한다. 1916년경부터 이 포도무늬 항아리를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주변 사람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말 그대로 그의 비장품(秘藏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광복이 되면서 고지에게 일이 생겼다. 일본으로 한국의 문화재를 반출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고지는 고민 끝에 집안일을 도와주던 한국인 지인 김 모 씨에게 수십여 점의 골동품과 함께 이 백자를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자를 한지로 수십 겹 꼼꼼히 쌓아 나무상자에 넣어 김 씨에게 건넨 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만큼은 잘 보관해 달라”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리곤 찾으러 올 날을 기대하며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상황은 일본인 고지의 기대를 빗나갔다. 1946년 경, 김 씨의 아들과 사위는 고지가 맡긴 골동품들을 야금야금 팔아먹었다. 급기야는 이 포도무늬 항아리까지 골동상 권명근에게 2만5000원을 받고 팔았다. 권명근은 이것을 되팔아 큰돈을 벌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한영호라는 골동상을 통해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에게 포도무늬 항아리의 구입을 의뢰했다. 장택상은 당시 내로라하는 고미술 컬렉터 가운데 한 명이었다. 권명근은 ‘안목도 있고 돈도 있는 장택상이라면 이 백자를 알아보고 후하게 사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다. 최고의 권력자였던 장택상이 농간을 부린 것이다. 장택상은 이 항아리가 장물이라는 이유를 들어 권명근을 겁박해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했다. 이어 김 씨로부터는 강제로 양도를 받아냈다. 장택상이 그 대가로 김 씨에게 내준 돈은 5만원. 이 항아리가 정상적으로 거래되었다면 최소한 수십 만 원은 충분했을 것이다. 당시 크고 좋은 기와집이 대략 2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1946년 장택상의 품에 들어간 이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는 1960년경 다시 세상에 나왔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던 장택상은 선거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백자를 처분하려 했다. 장택상 집에 자주 드나들던 골동상 여럿 가운데 장택상의 신임이 돈독한 장규서가 이 항아리의 거래를 맡게 되었다. 장규서는 삼보당의 장형수를 찾아갔다. 장형수는 호암 이병철이 믿고 거래를 맡긴 사람이었다. 장규서는 ‘이렇게 비싼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병철 회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형수는 ‘1,000만 환’에 놀라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장형수가 보기에 항아리 값이 너무 비싸 이병철 회장에게 말도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장규서는 또 다른 골동상 홍기대를 찾아갔으나 성사는 되지 않았다. 역시 가격 때문이었다. 이러는 사이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가 1,000만 환에 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이 골동계에 퍼졌다. 이 소문은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의 귀에 들어갔다. 김활란 총장은 당시 대표적인 컬렉터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안목도 뛰어나 좋은 고미술품을 수집했고, 자신의 수집품을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화여대 박물관은 1935년 출범했지만 6.25 전쟁 와중에 소장품이 모두 소실되었다. 김활란 총장은 그 아픔을 딛고 피란지 부산에서도 고미술품을 수집했다. 전란 중에 우리의 전통 문화재가 사라지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52년엔 부산의 이화여대 임시 교사(校舍)의 본부건물인 필승각(必勝閣)에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전시함으로써 박물관 기능을 재건했다. 전쟁통이었지만 우리 한국인의 자존심과 용기를 되살리고 부산에 있던 외국인과 유엔군에게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국보 107호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18세기, 높이 53.3㎝)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김활란 총장은 곧바로 이화여대 박물관 공간을 다시 확보했고 1960년엔 제대로 된 박물관 건물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 항아리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던 김활란 총장은 당장 장규서에게 달려갔다. 장규서와는 인연도 각별했다. 전쟁 시기 부산에서 김활란 총장의 유물 수집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바로 장규서였다. 그렇기에 김활란 총장으로서는 이 항아리는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활란 총장은 “이화여대에서 제대로 된 박물관을 설립하는데 여기에 전시할 수 있는 좋은 문화재가 필요하다. 학생들이 우리 역사와 전통을 배우고 느낄 수 있도록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를 이화여대에 양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장규서는 김활란 총장을 위해 장택상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결국 거래는 성사되었다. 거래가는 1만 5,000환. 그때까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가격이었다. 당시 괜찮은 청자, 백자가 2만 환 정도였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수집하는최고급 청자, 백자도 250만 환 안팎이었으니, 이 철화백자 항아리의 가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1만 5,000환이었다고 한다. 이 항아리가 지금 거래된다면 당연히 수백억 원을 호가할 것이다. 김활란 총장이 구입한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화여대 박물관의 최고 명품이 되었다. 학생들에게 우리의 명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래서 우리 전통미술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김활란 총장의 꿈은 이루어졌다.
1960년, 김활란과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의 만남. 그 만남은 이 항아리가 더 이상 여기저기 떠돌지 않고 한 곳에 안착해 지속적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택상의 컬렉션은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인해 상당수가 파괴되었고, 1960년대에는 선거 비용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흩어지고 말았다. 물론 이 포도무늬 항아리가 김활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도 한국 땅을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와 용도를 제대로 알아보고, 1만 5,000환이라고 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을 기꺼이 지불한 김활란이 있었기에 이 항아리는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국보 107호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는 보고 또 보아도 기분 좋은 최고의 명품 백자다. 그건 이화여대 박물관만의 자부심이 아니라 고미술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자부심이다. 컬렉터로서 김활란의 존재 의미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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