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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집 없음’, 갈 곳 잃은 불확실함의 표상

글 한혜수

홈리스의 도시

 

문재원, 〈함께 만드는 집〉, 2016

‘홈리스(homeless)’라는 말에는 자본주의 하의 극빈층이자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도시의 마지막 자유인이라는 낭만적인 수사가 으레 관통한다. 《홈리스의 도시》전 리플릿에서는 ‘홈리스’는 집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숙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의 상태를 말하는 형용사다. 하지만 집(물리적)을 상실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노숙임을 감안한다면 홈리스는 곧 노숙자인 셈”이라며 다소 넓게 정의하고 있다. 결국 홈리스는 집이 없는 상태를 말하기도 하고 노숙인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다. 전시 서문 말미에서는 스위스의 심리학자 퀴블러 로스가 개인의 불치병 진단에 대해 분노, 타협, 우울, 체념과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로 정리한 개념을 적용해 홈리스를 바라보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홈리스 문제를 불치병과 등가로 보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거니와 전시를 통해서도 이러한 개념들이 와 닿지 않는다는 점은 지적할만하다. 일단 이 테제를 보여주기 위해 전시장을 직접적으로 다섯 구역으로 구획한 것도 아니었고, 그보다는 마치 홈리스의 디아스포라적인 속성을 나타내려는 듯 작품들이 전시장 곳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시된 작품들을 읽어 내려가면 《홈리스의 도시》전이 노숙인은 물론 도시와 주거, 여성, 이주, 자본주의 등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문재원 작가의 레고 설치물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데, 〈함께 만드는 집(Hang Together)〉이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관객 참여형 작업이다. 마침 네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바닥에 늘어선 레고를 만지고 있었는데, 마치 퍼포먼스로 착각했을 정도로 참여라는 작가의 의도를 매우 잘 드러내고 있는 광경이었다. 한편 건너편 벽에 걸려 있는 귀퉁이가 잘린 금박지들과 하얀 A4용지들이 눈에 띈다. 이는 이원호 작가의 〈Looking For〉로 금박종이들을 자세히 보면 부동산 매물 시세가 적힌 광고지의 형식 그대로 희미하게 양각되어 있다. 그 옆에 나열된 하얀 종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부동산 시세가 적힌 총천연색의 전단지를 뒤집어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꽃무늬 방석이 깔린 긴 의자 맞은편 벽면에는 살구색 스커트를 휘날리는 사진이 걸려 있고, 가정 내 폭력과 남편의 외도 등으로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익명 여성의 독백이 텍스트로 인쇄되어 적혀 있다. 이 전시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성 홈리스 문제를 다루는 조영주 작가의 〈가정상실〉이다. 치마와 구두로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매끈하게 잘빠진 표면의 사진과 홈리스 여성의 처연한 사정은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질문을 제기하는 듯하다.
유목연, 〈노숙자 학원〉, 2016그 다음 구역에는 유목연 작가의 〈노숙자깡통〉과 〈노숙자 학원〉이 있다. 〈노숙자깡통〉은 제목 그대로 노숙인들을 위한 깡통으로 담배와 현금 1,200원, 구걸 문구를 적을 수 있는 연필 등‘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위기를 모면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유목연 작가의 위트는 〈노숙자 학원〉에서도 발견된다. 대치동 학원 강사처럼 셔츠와 넥타이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동영상 강의 속 선생님은 사실 노숙인이다. 노숙이 전공인 선생님은 잠자리, 끼니를 때우는 경로 등 노숙인으로서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지 전문적으로 설명한다. 그 옆 섹션에서 앞뒤로 상영되고 있는 영상 작품들은 홈리스의 문제를 해외로 확장한다. 어반 싱크탱크(U-TT)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시 중심부의 건물 ‘토레 다비드’를 도큐멘트했다. 이 45층짜리 사무용 건물은 금융위기로 공사가 중단된 후 콘크리트 골조를 그대로 드러낸 채 비어 있다가 갈 곳 잃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치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현재는 건물이 비워져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동아시아의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가장 구석의 벽돌 계단 아래로는 심치인(Sim Chi Yin)이 기록한 이른바 ‘쥐족’(Rat Tribe, 중국 베이징 지하벙커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사람들) 중 꿈을 품고 시골에서 상경한 청년의 인터뷰와 사진이 영사되고 있다. 영상은 현재 쥐족으로 불리는 이들이 터전 밖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음을 알리며 끝을 맺는다.
대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사유지와 공유지로 도시공간을 구획한다. 홈리스들이 점유하는 영역은 공유지이지만, 공유지를 사유화하려는 의지들은 여러 가지 ‘창의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안티홈리스 벤치’는 공원 벤치에 뾰족한 스파이크(spike)가 설치되어 있어서 동전을 넣으면 스파이크가 자동으로 들어가 한정된 시간동안만 이용할 수 있는 벤치다. 더럽고 불쾌한 노숙자들을 쫓아낼 수 있게 됐다며 많은 시민들이 이에 환호했다. 안티홈리스 벤치도 여러 형태가 있어서 벤치가 플라스틱 곡선으로 굽어 있거나 가운데가 솟아 있는 등 자연스럽게 홈리스들로 하여금 몸을 뉘이지 못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본 전시에서도 안티홈리스 벤치를 다루는 작가가 있는데 파비안 브루싱(Fabian Brusing)과 레아 보로메오(Leah Borromeo)가 그들이다. 파비안 브루싱이 정적인 화면으로 벤치의 작동 방식을 담담하게 보여준다면 레아 보로메오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오히려 안티홈리스 벤치 위에 간이침대나 미니 책장을 만드는 등 유쾌하고 역동적인 시도들을 보여준다.
한편 아르코미술관은 2014년 겨울 협력기획전 《즐거운 나의 집》에서 ‘주거’의 의미를 물었던 바 있다. 본 글에서 다룬 《홈리스의 도시》도 실은 제1전시실의 정림건축문화재단이 기획한 전시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과 함께 감상하도록 되어 있다. 건축적인 측면을 먼저 살폈다면 그 다음에는 예술적인 해석들을 모아 의미를 열어 두는 동선이다. 규모에서 차이가 나긴 하지만 ‘집’과 ‘집 없음’이라는 대구적인 두 주제를 다뤘기에 관람객으로서 두 전시를 비교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그러나 《즐거운 나의 집》에서 전시 전체가 집처럼 꾸며져 작품과 주제 사이를 유기적으로 이어내려는 의지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던 반면 이번 《난민을 위한 건축》과 《홈리스의 도시》에서는 국제적인 스케일의 ‘난민’과 편재하는 홈리스를 동시에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에서였을까, 아니면 작품들이 모두 뚜렷하게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일까, 안타깝게도 작품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난민을 위한 건축》에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비교적 힘주어 말했다면 2층에 와서 ‘홈리스’라는 느슨한 연결고리마저 (서문에서 밝히듯) 포괄적인 ‘집 없음의 상태’로 희석되고 심미화되었다. 작품들도 덩달아 돌아갈 집을 잃어버린 걸까. 홈리스를 불치병과 개념적으로 나란히 두려는 시도 역시 위태롭게 느껴졌다. 불치병 환자에 대한 대상화를 동시에 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홈리스’의 위태로움이 전시를 통해서 그대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과연 긍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판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은 전시가 남겨준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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