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TOP

DRAWING BOOK

홈커밍보이 ④ 왜 그렸나요

글 오재형

오재형, 〈왜 그렸나요〉, 디지털, 2017“모델을 그리는 이유가 뭐죠?”
첫날에도 물었고 오늘도 물었다. 이 질문은 아마 세 번째 만남에서도 이어질 것이고 홈커밍보이가 매번 성의껏 답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온전히 그의 대답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건 왜 그렸나요?”
나도 작업하면서 숱하게 들어온 질문이다. ‘좋아서요.’라고 답하는 것이 아마추어 같아서 미술 잡지에 실리는 글 마냥 개념을 정립하고 작업의 당위를 현란한 말로 설명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하지만 작가에게 작품의 이유를 즉각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작가 본인조차 작업의 이유를 명확하게 알기란 불가능할뿐더러,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것을 언어화시키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세상은 작가에게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급해진 작가는 자기 말이 아닌 남의 말을 빌려 도배하게 된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작가노트 잘 쓰는 법’이라는 외국 사이트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제1원칙은 “절대로 들뢰즈를 언급하지 말라”였다. 아니 이렇게 뜨끔할 수가.
작품의 이유를 추궁당하고 당위를 요구하는 미대 수업에서 많은 예비 작가들은 괴로움을 겪는다. 반대로, 흔히 유려한 스테레오 타입의 언어로 작업을 근사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본인의 작품 역시 좋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텐가. 예술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행위에 적절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행위보다는 설명이 우위에 있는 시대에 속해 있는데.

 

“왜 그렸나요?”라는 질문에는 보통 두 가지 의도가 숨어 있다. 하나는 ‘네가 하는 작업 정말 구린데 이렇게 뻔하고 식상하고 하나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왜 만들었니? 설명이라도 해볼래?’라는 의도. 작품을 보는 이가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작품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질문’으로 가장했을 때 작가는 이미 했던 말들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무한히 피곤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작품에 공감하지 못할 때 작가에게 “저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 결코 무례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굳이 “왜 그렸나요?”라고 질문하는 사람을 판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보통 짝다리에 팔짱을 끼고 세모 눈깔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왜 그렸나요?”라고 묻지만 사실 “왜 그랬나요?”라며 따지고 싶은 것이다.
반대로, 귓불을 살랑살랑 흔들며 보름달 눈깔에다가 양 어깨를 앞으로 밀어내는 질문자의 “왜 그렸나요?” 자세도 있다. ‘네가 만든 작품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 더 알고 싶어. 그냥 아무말이라도 좋으니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려줘.’라는 뜻이다. 이 경우에는 작품에 이유를 묻는 것이 우문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실행하게 된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에게 쓸데없는 대화를 갈구하는 것처럼.
홈커밍보이에게 질문하고 있는 내 자세는 후자 쪽에 가까웠다. 그림에 약간의 호감이라도 없었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에게 물었다.

 

“왜 그리나요?”
“지금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속한 지금 이 순간을 알고 싶어서요.”
그의 답변은 여전히 시적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속한 지금을 알고 싶다면서 왜 나를 그리나요?”
“아, 저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마찬가지로 오재형 씨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오재형 씨가 마치 거기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뭐랄까, 그냥 살아있는 정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나를 둘러싼 공간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모델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자코메티의 고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아, 방금 얼굴 부분이 망했어요. 잠깐 쉬죠.”

 

반 고흐가 모델의 내면까지 꿰뚫는 초상화를 그려냈다면, 홈커밍보이의 붓질은 모델의 외면에 닿기조차 어려워했다. 애초에 그가 그리려고 한 것은 본인과 모델 사이의 공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초상화를 그리는데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홈커밍보이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골방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어느 고독한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발굴하고 조망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고, 사실 그는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난 핑곗거리에 불과했다. 그가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었다면, 나는 무엇이든 적당히 소재 삼아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물 같은 존재였다.

 

 

THIS DIRECTORY

THIS 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