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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당황스럽도록 아름다운

글 장서윤

서승원 개인전
5.17-6.10
노화랑

 

 

 

당황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그림들을 보고는 찾아온 전시가 맞는지 돌아서서 확인할 만큼의 당황이었다. 서승원 작가가 누구이던가. 19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의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에 참가한 이후 한국 미술사에서 단색화의 흐름과 결을 같이 하며 논의되는 작가이지만, 차분하고 담담한 색조에 이지적인 조형 원리를 담은 그의 작품은 단색화와는 또 ‘다른’ 회화적 제스처라 생각했기에 뇌에 순간적인 오류가 발생했던 것이다. 기하학적이고 조형적인 화면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덩어리’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전시장의 하얀 벽면 덕분에 캔버스 속 그림들은 경계를 넘어 공간으로까지 침투하는 모양새다. 달라진 작품 스타일과는 달리 작품의 제목은 동일하다. 〈동시성〉. 색과 면, 공간과 회화가 시공간의 축에서 그야말로 ‘동시(同時/同視)’화된 것이다.
당황스러움은 잠시 접어두고, 전시장 2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1970년대 그가 선보인 〈동시성〉 시리즈가 설치되고 있어 1층의 최근작과의 대비를 극명하게 살필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후반기로 일컬어지는 근작들이 형태가 미미한 혹은 무(無)에 가까운 평면이라면, 2층의 구작들은 명확한 선과 면의 어떤 형태들이 분명하게 지각된다. 이지적이고 계산된 화면에서 감각적이고 무작위로의 전환은 과연 40년이라는 시간차가 만들어 놓은 건널 수 없는 간극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피어오를 때쯤, 구작 캔버스에서 그동안 미처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사각형(스러운 것)들이 화면을 부유하고 있음을 ‘재’발견 한다. 색면에서 시작된, 아직은 명확하게 사각형이라 불릴 수는 없지만 분명 캔버스를 부유하다 점차 형상을 갖추고 비슷한 것들끼리 운집하여 비로소 ‘형태’를 갖춘 것이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발견된 시간은 무(無)에서 유(有)의 순서일 수도, 혹은 역으로 유(有)에서 무(無)의 순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유(有)와 무(無)가 ‘동시’였고, 캔버스의 공간과 형상의 시간이 ‘동시’였다는 것, 그것이 이후 화면 안과 밖의 경계를 두지 않고 구름처럼, 안개처럼, 빛처럼 화면을 부유하는 최근의 〈동시성〉 시리즈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구작에서 아직 발아하지 못한 형상들을 발견하고 나서 다시 1층으로 내려오니, 형상인 듯 형상 아닌 색면 구름들이 온 전시장을 떠돈다. 통유리를 통서승원, 〈동시성 17-320〉,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3cm, 2017 이미지 제공 : 노화랑해 바깥에서 들어오는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색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묘한 입체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이 대목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납작하고 평평해야 할 커다란 캔버스는 뒤로 물러나고 두둥실 떠다니는 ‘솜사탕’들이 엎치락뒤치락 하며 서로 앞서고자 하는 ‘허상(illusion)’이 감지되니, 그토록 모더니즘 회화가 추방하고자 한 ‘환영(illusion)’의 (의도치 않은) 복귀이지 않나?! 단색화라는 한국식 모더니즘의 시작으로부터 출발한 서승원 작가가 종착한 곳이 반 모더니즘적이라는 점은 과연 무엇을 시사할까. “예전엔 차고 날카롭단 소리도 많이 듣고 그래서인지 청색도 즐겨 쓰곤 했는데 나이가 드니 점점 욕심을 버리게 되고 요즘엔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가를 많이 생각해요. 예술이 작가의 정신이고 삶이니까 그게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고 반영되는 것이지요.”
회화 자체의 존재를 묻던 작가는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질문의 화살을 돌려 자신의 존재, 그리고 인간 존재를 묻고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감의 색면이 삶의 이치를 통달한 자의 관조와 여유가 만들어낸 ‘포용’일지, 여전히 질문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정처 없는 답변처럼 떠다니는 질문의 회화적 현현(泫泫)일지, 캔버스 위 색면처럼 머릿속을 하염없이 떠다니고 있다. “어디로 가고 계신 건가요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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