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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덜 퀴어한 이미지, 더 퀴어한 관객

글 박종주

리드 마이 립스(Read My Rips)
5.10-5.31
합정지구

 

 

서동진, 〈파스빈더처럼〉, 아카이브 가변설치, 2017 사진: 홍철기

당황스러운 일이다. ‘퀴어’니 ‘드래그’니 하는 낯선 단어가 난무한다. 기껏 단어를 익히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정작 ‘퀴어한’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퀴어한’ 이미지들은 오용석의 두루마리 〈파올로의 책〉과 서동진의 아카이브 〈파스빈더처럼〉의 책들에 숨겨져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윤곽이 뭉개진 몸들을 담은 이은새나 오용석의 회화, 흑백의 팝아트로 구현된 김의성의 실크스크린, 파편화된 신체들을 모사한 이미래의 설치 같은 알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일반적으로 드래그는 반대편 젠더를 ― 옷차림, 화장, 발성 등을 이용해 ― 과장되게 흉내내는 성소수자들의 유희 혹은 공연 양식을 가리킨다. 여성이 남성을 흉내내는 것을 드래그 킹, 남성이 여성을 흉내내는 것을 드래그 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전시에, 그런 이미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리드 마이 립스》는 이 드래그 개념을 확장해 고정된(것으로 생각되는) 두 젠더 사이의 경계 넘기 뿐 아니라 몸과 몸 아닌 것의 경계 넘기,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 넘기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들은 조금 더 직설적인 편이다. 오프닝 리셉션에서의 퍼포먼스, 이승재의 〈프린지〉는 주변인의 생활양식을 다룬다. 흰 술이 달린 옷을 입은 퍼포머가 벽에 몸을 밀착한 채 전시장의 주변을 돌면, 바닥에는 흰 술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술들에는 퍼포머의 정체성을 기록한 작은 메모들이 실려 있다. ‘주변’의 존재를 환기하며 퍼포머는, 그 주변에 자신의 흔적을 각인한다.
이반지하는 ‘헤테로들의 교양 공간’인 화이트큐브에 성 소수자들의 하위문화를 끌어들임으로써, 그리고 리타/이연숙은 같은 공간에 성 소수자들의 ‘정치적 잡담’을 끌어들임으로써, 공간과 권력의 관계를 묻는다. ‘성 다수자’라 할 만한 이들은 이 퍼포먼스 앞에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소수자가 되고 만다. 서동진의 퍼포먼스 〈퀴어 낭송 연습〉은 성 소수자 특유의 언어를 탐구하며 그것을 하나의 고유한 양식으로 자리매김시킨다.
퍼포먼스들의 ‘기괴함’에서, 그리고 전시된 이미지들의 뭉개지거나 파열된 경계들에서, 어떤 경계 넘기를 읽어내는 것, 정확히는 경계란 것이 실재하며 그리고/그러나 그것은 종종 쉽게 횡단된다는 사실을 ― 또한 그 사실을 숨기는 어떤 권력관계가 있다는 것을 ― 읽어내는 것은 ‘퀴어한 독순술’을 요구한다. 기묘한, 괴상한 것을 뜻하는 퀴어라는 낱말은 성 소수자 운동에서 자신들의 독특성을 뽐내는 단어로 전유된다. 그저 이상한 것, 비전형적인 것을 퀴어한 것으로 읽어내는 데에는, 관객들 스스로의 이러한 전유가 필요하다.
퀴어니 드래그이니 하는 단어가 여전히 낯선 한국에서, ‘퀴어한’ 이미지들이 주류 공적 영역에 등장하지 못하는 한국에서, 어쩌면 《리드 마이 립스》는 성 소수자 ― 그 존재 및 문화의 ― 가시화라는 중요한 단계를 뛰어넘은, 조금은 이른 전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전시를 통해 관객들이 퀴어한 독순술을 배울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이미지들을 퀴어하게 재독해 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면, 이 전시의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리드 마이 립스》는 성 소수자 문화의 전형적인 이미지들 대신 알 수 없는, 어쩌면 덜 전복적이고 덜 공격적인 이미지들을, 그러니까 ‘덜 퀴어한 이미지들’을 내걺으로써, ‘퀴어한 관객들’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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