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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전위예술가 정강자, '행동하는 여성'의 막을 내리다

글 정필주

대학 실기실의 정강자, 연도미상정강자 작가가 7월 23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대한민국 1세대 전위예술가로서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강국진(1939~1992), 정찬승(1942~1994)과 결성한 ‘신전동인’, 실험예술을 표방한 ‘제4집단’ 등의 동인 활동을 통해 전위적인 실험예술을 선보였는데, 특히 그가 강국진, 정찬승과 선보인 해프닝들은 이론적, 실천적 맥락에서 대한민국 현대미술사 최초로 평가받고 있다.
정강자 작가는 ‘무동인(無同人)’, ‘오리진(Origin)’ 동인의 소속 작가들과 함께 개최한 《청년작가연립전》(1967, 중앙공보관)에서 오광수(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당시 『공간』 편집장)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12.14)을 선보였다. 이 최초의 작업 이후 이어진 그들의 해프닝들은 당시 『한국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및 『대한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 연거푸 소개되며 상당한 반향을 이끌어냈다. 그 중 1968년 6월 30일, 서울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진행되었던 〈투명풍선과 누드〉는 정강자의 증언1에 따르면 말 그대로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투명풍선과 누드〉가 대중에 공개된 1968년은 당대 빈 행동주의(Aktionismus)를 이끈 귄터 브루스(Günter Brus), 오토 뮬(Otto Mühl) 등이 작품으로 인해 수감되는 등, 단순히 표현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옥행이었던 시대였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무대 중앙에 앉아 있는 정강자가 입고 있는 와이셔츠를 강국진과 정찬승이 찢어내면, 관객들이 투명풍선을 직접 그의 몸에 붙이기 시작하는 〈투명풍선과 누드〉는 온몸에 풍선이 붙은 반나체의 정강자가 일어나는 순간 굉음과 함께 조명이 꺼지면서 막을 내리는 해프닝이었다. 미니스커트 단속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해프닝’보다 수년 앞서 일어난 일이었음에도 퍼포먼스는 큰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현재 실험/즉흥 공연예술계에서도 쉽사리 모으기 어려운 3백여 명의 관객들 앞에서, 그것도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의 음악을 배경으로 진행된 이 해프닝을 통해 정강자는 1세대 전위예술가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남겼으나,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화실의 학생들을 모두 잃는 것은 물론 각종 매스컴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1970년 관객 참여예술을 꾀했던 첫 개인전 《무체전(無體展)》(국립공보관)이 당국에 의해 강제 철거당하는 아픔을 안고 싱가포르로 떠나게 된다. 이때 그의 심경은 인도네시아 염료 기법 바틱(batik)으로 표현된 〈싱가포르의 방〉(1979)에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67년 《청년작가연립전》 당시 무단으로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가두 피켓 시위를 하다 연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후 진행된 해프닝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과정에서 다시 유사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즉결심판까지 받았던 것을 고려하면 전위예술가들이 공권력이나 사회의 몰이해를 두려워 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버스킹(busking)’을 하다 잡혀간 셈인데, 그 이면에는 당시 사회의 기성세대적 ‘규범’에 직접 충돌하여 그것을 타파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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