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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정치적이고도 미학적인

글 장서윤

《미래 과거를 위한 일》 전시 전경, 사진 : 홍철기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미래 과거를 위한 일》전이 진행 중이다. ‘미래 과거’라는 언뜻 와 닿지 않는 제목의 이 전시는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할 수 있는 라틴아메리카 출신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공립기관이라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정체성을 감안했을 때, 왜 하필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전시인가 하는 물음은 당연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술관 사업의 일환인 ‘비서구권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전시라는 사실 외에, 왜 작금의 시기에 라틴아메리카의 작품을 소환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동시대 한국의 미술 씬(scene)과 어떻게 접속될 수 있는지 등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비서구권’이라는 이름
《미래 과거를 위한 일》을 마주하며 가장 두렵고 걱정스러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전시 자체의 정체성, 즉 ‘라틴아메리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콜럼버스가 라틴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지 무려 600년이 넘었음에도, 한국인에게 라틴아메리카는 여전히 ‘인디오(Indio, 콜럼버스는 1492년 신대륙 발견 당시 이곳을 인도라 착각하며 원주민들에게 인디오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수십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이 명칭은 여전히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의 이미지로 강하게 인식되어 있다. 이에 따라 그 우려는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첫 번째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정보와 지식의 부족으로 전시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이며, 두 번째는 오랜 시간 각인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이미지로 인해 ‘타자화’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애초에 ‘비서구권’ 프로젝트 하에 전시를 진행하며 기획자가 가장 크게 고민한 것 역시 이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점에서 국내 국공립기관에서도 비교적 실현되기 힘든 조건인 1년 정도의 전시 준비 기간은 기획자와 관람자 모두에게 비교적 좋은 방향으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시간 동안 비서구권 혹은 제3세계를 다룰 때 발생하기 쉬운 우려의 가능성들을 검토하고 리서치의 결과물들을 전시의 형태로 제시할 수 있으니 말이다. 라틴아메리카를 전시의 주제로 선택한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미국 유수의 미술관을 다니며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지역 출신의 작가들을 섭외한 것 역시 주요했다. 전시가 작은 규모의 비엔날레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2014년 ‘비서구권 프로젝트’로 진행된 《아프리카나우: Political Patterns》와 달리 제목 상에 ‘특정한’ 지역의 이름도, ‘정치’적인 함의도 결코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라틴아메리카라는 지역의 ‘생소함’을 전시의 주요 요소를 삼고 있지도 않다. 으레 지역 미술하면 클리셰(cliché)처럼 따라 붙는, 토속성을 상기시키는 어떤 패턴도 색감도 전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차분하고 정제된 작품 설치와 여유를 둔 공간 활용 속에서 작품 간 유기적인 연계가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라틴아메리카라는 측면에서) 지엽적인 동시에 (글로벌 신자유주의체제 아래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문제들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적인, 그리고 (형식적으로) 미학적인 동시에 (개념적으로 혹은 이념적으로) 정치적인 전시. 《미래 과거를 위한 일》의 좌표는 생각보다 여러 군데 찍혀 있었다.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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