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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우리의 우주가 빛나는 동안

글 백지홍

모든 죽음은 그 생명이 품었던 우주를 상실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죽음은 세계에 더욱 큰 상실을 만들죠. 3월 20일, 케냐에서는 ‘수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코뿔소가 고령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대수명이 40~50년인 종이 45년을 살았으니, 짧은 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수단은 마지막 남은 북부 흰코뿔소 수컷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북부 흰코뿔소라는 종은 사실상 멸종을 맞이했습니다. 암컷이 두 마리 남은 상황에서 인공수정을 시도한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거대한 몸과 두꺼운 피부 그리고 위압적인 뿔을 가진,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이 강인한 종도 인류의 욕심 앞에서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1900년, 50만 마리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던 코뿔소는 이제 그 대부분의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아니, 코뿔소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동식물이 지금도 멸종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동물의 멸종 소식은 가까운 단 한 사람의 죽음보다 덜 슬픈 소식일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이의 목숨과 코뿔소라는 종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는다면, 저는 코뿔소라는 종의 생명을 택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상실의 크기는 주관적인 것이고, 저는 이기적인 존재기 때문입니다. 나의 상실을 막기 위해 다른 상실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욕심입니다.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이래, 멸종이 끊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특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행복을 찾아가는 우리 인류는 행복할까요?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기적인 우리는, 안타깝게도, 스스로를 고양할 때뿐만이 아니라, 단순히 상대적 우위에 섰을 때도 일종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따라서 주변을 깎아내리는 것으로도 행복에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 때로는 그것을 욕심내게 됩니다. 자신의 절대적 가치를 높이는 ‘위를 향한 욕심’의 반대에 있는, 주변을 낮추려는 이 ‘아래를 향한 욕심’은 권력이나 근력, 재력처럼 사회에서 흔히 언급되는 기준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익숙한 것’만을 추구하고 ‘낯선 것’을 배제하려는 마음만으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2018년의 지구는 70억 명이 넘는 인류를 배불리 먹일 식량이 생산되고 있고, 인류를 찾아다니며 살육을 행하는 괴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군가는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고, 누군가는 총칼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는 것은 아래를 향한 욕심 때문입니다. 이 욕심이 강해질 때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종 내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주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번호에서 다루는 것처럼 4·3사건을 기억하고 “미 투”라고 외치는 것은, 누구의 우주도 작아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의 노력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각자의 우주가 존재하는 동안에 가장 빛낼 수 있는 방법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연대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자신을 옥죄는 병마와 55년간 싸워가면서도 우주의 신비를 연구해 온 스티븐 호킹 박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면 우주는 대단한 곳이 아닐 것”이란 말을 남겼습니다.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우주를 조금 더 대단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이들, 나아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인류, 나아가 지구를 나눠 쓰는 동식물들까지 ‘우리’ 안에 담길 수 있습니다. 아래로의 욕심이 아닌, 우리 모두를 고양시키고자 하는 욕심을 부려 봅시다.
코뿔소 수단과,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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