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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지겨운 이야기

글 김아영

 

2016년 가을, 그리고 2018 또다시

SNS상에 ‘#예술계_내_성폭력’이란 이름으로 성추행과 성폭력의 경험에 대해 긴 고백과 폭로가 이어졌던 것은 2016년 가을이었다.당시 가해자로 호명된 이름들이 너무나 친숙했던 우리의 후배, 동료, 선배, 멘토로서 이 자그마한 미술계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겪었다. 많은 이들이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고 잠 못 이루었었다. 생생히 기억난다, 그 날들이. 이제 그로부터 약 1년 반쯤 시간이 지났고, 그때의 충격이 다 가라앉지 않았음에도, 또 다른 충격의 파도가 겹겹이 밀려와 만성피로를 조장하는 중이다.

최근 확산된 ‘미투 운동(#MeToo Movement)’, 특히 문화예술계와 관련한 미투 고백들과 이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응시하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인간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에 놀라우리만치 무감각할 수 있다는 것. 상상으로는 많은 일들에 가닿을 수 없고, 촉지 가능한 영역에 있어야만 인지 가능한 것일까. 인간의 공감 능력에 이렇게 큰 한계와 맹점이 있었음을 이러한 방식으로 확인하게 되다니. 씁쓸하고 화가 났다. 혹자는 국내의 미투 운동이 정치공작의 일환이라고 본다. 혹자는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일련의 고백과 폭로가 좀 더 정돈된 형태로, ‘올바른’ 형태로 빚어져야 한다고도 한다. 혹자는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 중 무고한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혹자는 여성과의 사이에 오해를 살 만한 일이나 억울할 만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펜스룰(pence rule)을 선언하기도 한다.

좋다. 예전에, 지질학에 대해 읽은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대상에 가해지는 자극 또는 힘이 가용치를 넘어서 대상이 탄성력을 소실하고 원래 상태로 복구될 수 없을 때, 이 대상은 영원히 변형되고 만다. 여기에 변형력이 더 가해지면 물체는 결국 파괴된다. 외부 자극 ― 스트레스와 변형력과 가소성에 대한 얘기다. 고유의 상태를 영영 회복할 수 없을 때, 대상은 본래의 모습이 뒤틀리거나 끊어지는 모습으로, 즉 비가역적으로 변형함으로써 그 변형력을 방출하고, 가시화하고 폭로하는 것이다.

하물며 사물도 이러할진대, 이 대상을 인간으로 바꾸어 보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의 인과관계를 이에 대입해 보라…! 미투 운동은, 여성들이 평생을 살아오며 누적된 외부 자극이 가용치를 넘어, 개인 혹은 복수의 개체가 더 이상 원래 상태로 복구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이대로 조금만 더 지속되면 결국 파괴되고 말 것을 예감할 때, 더 이상 우회하거나 피신할 도리가 없을 때 내지르는 비명이다. 다른 해결법을 찾을 수 없을 때, 혹은 기존의 해결법들이 유명무실함을 인지할 때 압력밥솥처럼 터져 나오는 반작용이다. 이것은 지진이고, 화산 폭발이고, 지각 변동이다!

내용물이 임계점을 넘고 끓어올라야 화산이 폭파한다. 분화구에 차곡차곡 쌓인 먼지와 빗물과 흙더미를 터뜨리고 분출한다. 그 순간, 누적된 에너지가 더 이상 고유의 상태를 용납하지 않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통상적 절차와 이성적 개입이 가능한가? 누가 이 불가항력의 순간에 통솔과 질서를 요구하는가? 누가 이에 대해 판단하고 정렬을 명령하는가? 차라리 악을 쓰고 외치며 종을 울릴 일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은 지금의 이 비명들이 너무나 소중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흐름이 한참 더 지속되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정돈과 질서는 그 이후의 것이다.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여성문화예술연합 성명서

#MeToo 운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6년 10월 ‘#오타쿠_내_성폭력’을 시작으로 미술, 디자인, 문학, 사진 분야 등 많은 분야의 예술인들이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용기 내어 고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발들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 명예훼손과 무고죄와 같은 보복성 고소로 잊혀져갔고, 피해자뿐만 아니라 대리인들과 조력자들도 피폐해져 갔다. 예술계 내 성폭력을 대처하는 어떤 시스템도 없었기에 가해자들은 반성도 없이 너무도 쉽게 예술계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7년 2월 여성문화예술연합에서 문화체육부와 여성가족부에게 전달한 요구사항을 시행했더라면 보복성 고소로 인한 피해가 이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가해자들이 당당하게 돌아올 일도 현저히 적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정부 부처의 졸속 대응을 보며 이와 같은 일이 올해에도 다시금 반복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2017년 1월 결성되었다. 문학, 미술, 영화, 디자인, 전시 기획, 사진, 출판 등 총 7개 분야 아홉 단위가 모여 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화체육관광부, 여성가족부 등 정부 부처에 지속적으로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예술계 성폭력 실태조사, 문체부 내 성폭력 전담 기구 설립,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징계성 조치, 예술계 성폭력 예방 교육 의무 실시 등 실질적 대책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1년 동안 여성문화예술연합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실행하겠다’는 답변과 ‘문체부에서 그 일을 할 근거가 없다’, ‘예산이 없다’는 답변 사이에서 지쳐왔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장관 취임 후 이번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예술계 성폭력 대책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

2018년 서지현 검사의 #MeToo와 최영미 시인의 #MeToo를 기점으로 연극계에서 봇물 터지듯 #MeToo 운동이 이어졌고 각계의 권력자에게로 확산되고 있다. 문체부는 여론과 국회의 압박이 커지자 지난 1년간 여성문화예술연합이 요구했던 정책들을 실행하겠다고 2월 20일에 발표했다. 언론에 보도된 기사만 보면 문체부는 필요한 정책들을 잘 실행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성문화예술연합이 문체부로부터 듣고 있는 얘기는 ‘가해자의 공적 지원금에 대한 제한 조치는 할 수 없다’, ‘신고는 여가부의 기존 기관에서 하면 된다’, ‘기존 기관들의 예술계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은 여성문화예술연합이 도와서 하면 된다’, ‘조사는 수사기관이 아니라서 할 수 없다’, ‘근거조항이 없다’ 등 회피적인 답변들뿐이다. 게다가 2017년에 실시한 예술계 성폭력 실태 시범조사에 대해서는, 조사 문항을 작성하고 조사 대상에 대해 자문을 했던 여성문화예술연합에조차 제대로 된 분석결과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런 무책임하고 관성적인 태도를 볼 때 문체부가 과연 예술계 성폭력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문체부는 1년 동안 많은 일을 해왔고 앞으로 실효성 있는 정책이 결정된 것처럼 언론에 발표하는 기만적인 태도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중략) 예술계는 공적 지원금이 많이 투입되는 곳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인복지재단, 서울문화재단을 비롯한 지역 문화재단, 지자체 등을 통해 문화예술사업 등으로 공적 지원금이 투입된다. 이 문제에 대해 문체부는 확실하게 징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책임지고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예술정책을 관할하고 공적 자금 집행을 결정하는 정부 부처로서의 책임이다. 현재 법률적 근거가 없다면 국회와 협조해 근거조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국회와 정치권에 말씀드린다. 성폭력 문제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으며 이념진영이 따로 있을 수 없다. 1년 동안 예술계 성폭력 해결에 미온적이었던 국회와 정치인은 예술계 성폭력을 정쟁에 이용하지 말고, 문체부와 장관에 대한 비판을 진영논리로 취급하지 말라. 국회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철저히 감사하고, 필요한 입법을 조사하여 적극적으로 입법 활동을 하길 바란다.

시민단체와 여성단체에 말씀드린다. 작년과 달리 예술계 성폭력 사건에 연대의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정책을 제안하는 데 있어 여성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존중하기를 당부 드린다. 일부 시민단체와 여성단체들은 여성 예술인들의 운동방향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소통하지 못한 채, 문체부에 별도의 창구가 필요 없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가해자가 예술계에 복귀를 못하게 예방하는 일이 우리 활동에서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체부의 성폭력 신고 창구 개설은 가해자에 대한 공적 지원금과 공적 지위 부여를 중단하고 예방하는 시스템과 연계하기 위해 필요하며,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동안 예술계는 반성폭력 정책의 사각지대였다. 성폭력 예방교육이 없었고, 예술계 성폭력 실태조사도 없었으며, 성폭력 성희롱을 신고할 예술계 창구도, 그것을 조사하고 해결할 기구도, 가해자에 대한 비사법적 제재 방안도 없었다.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에서 새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1년이 넘게 외면해온 정부가 대통령과 장관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예산과 실효성을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예술계 성폭력 특수성을 반영할 장치를 마련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예술인들은 1년이 넘게 기다렸다. 아무도 신고하지 않는 신고센터, 신고해도 어떤 해결도 없는 창구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라. 컨트롤타워를 맡은 여가부장관은 문체부가 예술계 성폭력 해결 시스템을 실효성 있게 만들도록 강력하게 견인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예술계 특수성을 반영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제대로 만들라.

 

2018년 3월 7일

여성문화예술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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