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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NG ART 1979~1994 ⑯

1983년, 애오개소극장, 미술동인 두렁

글 김종길

두렁 공동작품(주필 김봉준), 〈끝내는 한길에 하나가 되리〉, 캔버스에 먹과 단청안료, 500×300cm, 1983“적당한 공간을 찾다가 드디어 구해진 곳이 아현동 산동네 어느 지하실이었는데, 당시는 무슨 공장(이른바 ‘마찌꼬바’)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필 거기를 찾은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비교적 시내에 가깝고, 교통도 괜찮고, 월세도 버틸 만하고(그런데 1년 만에 주인이 월세를 100% 올리는 바람에 사실은 감당하기에 벅찼다. 시설 다 해놓았는데 나갈 수도 없고), 공간 이름도 아현(兒峴)이어서 우리말이 좋았고, 또 그 동네가 본바닥 탈춤 ‘애오개 본산대 놀이’가 펼쳐지던 곳이라니, ‘애오개’라 이름 붙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 정희섭, 「1980년대 애오개소극장을 아시나요?」 中

 

애오개소극장
1983년 7월 14일, 매일경제에 이런 단신이 실려 있다. “「두렁」 同人창립전, 애오개소극장. 젊은 미술동인 「두렁」창립전이 7~17일, 11일간 아현동 애오개소극(☎392~1613)에서 열린다. 공동 벽화, 판화전시 및 보급 창작탈, 민속화 등을 뒤섞어 보여주는 새로운 「미술판」. 정진영 김양호 오경화.” 이 작은 기사 하나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갖는 의미는 작지 않아서, 이후 현장미술, 참여미술, 파견미술, 공동체예술 등이 논의될 때마다 ‘미술동인 두렁’은 쉼 없이 호명되고 있다. 그런데 기사 속 《창립전》은 실제로는 《창립전》이 아니라 《창립예행전》이었다. 《창립전》은 그 이듬해 경인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왜 그들은 《창립예행전》을 소극장에서 했을까?
 

애오개소극장의 역사는 1982년 10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석화, 황선진, 박인배, 김봉준 등 당시 젊은 문화운동가들은 서로 마음을 모아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하나는 문화패 후배들을 단련시키고, 현장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농촌 현장 ‘두레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두레 작업’에 참여했던 문화정책 전문가 정희섭은 “나는 말하자면 앞의 일에 끼게 되었는데, 가톨릭농민회와 연계하여 농촌 현장에 문화패 조직(‘두레패’)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일을 ‘두레 작업’이라 했고 우리들은 ‘뜬두레패’라고 불렀다.) 처음 공간을 만들 때는 그런 뜬두레패가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연구개발 공간이자, 훈련 공간으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두레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애오개는 모르는 사이에 이미 착수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애오개는 어떤 곳이었을까?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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