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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의 순례

글 윤하나

《회한의 동산》 전시 전경, 사진: 김익현, 이미지 제공: 신도문화공간언젠가, 뱀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어쩌면 머나먼 인류의 기억에서 유래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 뱀에 물린 누군가의 충격적인 기억이 유전자를 통해 내게 전달돼 공포증을 심어줬다는 가설이다. 실제로 뱀을 접한 경험이 없는 이들도 뱀에 대한 확신에 찬 불안과 혐오의 감정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서 뱀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게 해 타락시킨 간악함의 대명사로, 또 그리스 신화에서는 뱀이 허물을 벗는 모습에서 재생과 부활을 떠올리며 인간을 구제하는 의술의 신을 상징한다. 이처럼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운 존재로서의 뱀은 때로 죽음의 도상이 되기도 한다.
 

 

김실비 작가는 이번 전시 《회한의 동산》에서 모든 것들이 급변하는 이 시대에 “유일하게 확정된 미래”인 죽음을 뱀이란 대상을 통해 바라본다. 전시가 진행 중인 신도문화공간은 사무실과 현관을 잇는 긴 직사각형의 복도식 전시공간이다. 작가는 공간이 가진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우선 전시장 입구에 서면, 길게 뻗은 바닥면을 따라 거대하게 프린트된 뱀의 형상이 관객을 기다린다. 입도 꼬리도 없이 몸통만으로 이루어진 뱀의 고리가 실타래처럼 무한대를 그리는 압도적인 광경이다. 흡사 자신의 꼬리를 삼킨 뱀, 고대 그리스의 상징 우로보로스(Ouroboros)를 연상시키지만 어디에서도 그 시작과 끝을 찾을 수 없다. 디지털 프린트 작업인 〈역광 순례길〉에는 검은 배경 속 3D로 그려진 뱀의 윤곽이 오로지 역광(逆光)을 통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이 완전한 암흑을 비추는 유일한 빛은 바로 뱀의 아래쪽이자 관객이 거니는 길 아래편에서 시작된 셈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발밑에서부터 가상의 빛이 걸음을 비추는 순례길을 제시한다.
 

이 길에 발을 딛고 들어서면 이내 친절하면서도 퉁명스러운 음성이 귀를 타고 들려온다. 복도 한편에 설치된 디스플레이에는 동물원의 유리 너머로 촬영한 뱀과 재난 현장에 투입할 용도로 개발된 뱀로봇 등의 이미지가 중첩된 영상이 재생된다. 전시와 동일한 제목의 영상작업 〈회한의 동산〉은 기다란 원통형 개체의 유연한 움직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의미가 분절된 당부 메시지를 공공장소의 안내방송 형식으로 전달한다. 어떠한 위험을 암시하면서도 정확히 경고하지 않는 이 〈회한의 동산〉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앞으로 끝나버릴 미래에 대한 한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위의 두 작업이 피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그로 인한 회한을 다각도로 그렸다면, 나머지 세 작업은 그 죽음의 통로에 선 우리를 조명한다. 먼저 순례길이 된 이 통로 사이에 설치된 6개의 〈문지기〉 이미지를 보자. 암호 화폐 투자자, 운동선수, 눈 오는 날의 부녀, 흩뿌려진 붉은 액체 등 사바 세계 속 누군가의 기록사진은 얇고 투명한 비닐 위에 전사된 채 회한에 갇힌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이 문지기를 지나치면 순례길의 마지막 지점인 8개의 거울 〈파고다〉에 다다른다. 각 거울은 팔방(八方)으로 비추도록 설치됐다. 관객이 탑돌이 하듯 거울 주변을 빙 돌 때면, 회한의 동산을 거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사이에는 3D 프린팅 기술로 제작된 오브제들이 마치 시대를 유추할 수 없는 어느 시기의 성물처럼 놓여있다.
 

작가는 동시대 정치사회적 현상을 종교·신화적 메타포를 활용해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우리가 간직해온 삶의 근원적 공포를 죽음과 뱀에 은유하며 독특한 서사와 경험을 만들어냈다. 더불어 끝을 알 수 없는 생과 사의 굴레 속에서 삶을 위협하는 유혹과 공포를 되돌아보려는 성찰로서의 회한을 제시한다. 만약 에덴의 동산이 이미 “실패한 낙원”이라면, 《회한의 동산》은 예견된 실패와 화해하는 순례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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