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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태고적 몸에 대한 찬가와 비가

글 정필주

《백만대군》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씨알콜렉티브몸(Body)의 에로티시즘, 그 자체에 대한 이순종 작가의 숭배적 그러안음은 부조리함의 변증법적 극단에서 다시금 그 완성을 보인다. 머리카락에 비하면 수십 배 커다란 몸집의 침을 하나하나 인조비단 위에 촘촘히 꽂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사 희로애락, 그 순간순간의 생명의 떨림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수없이 많은 침을 통해 집대성한 몸짓의 선명함은 오직 그 생명력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도구인 침은 그 쓰임에 따라서는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도 있는 양극성의 존재로, 몸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을 대하는 우리 인간문명의 양극단적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순종 작가는 그 양극단의 사이에서 웅크린 채 방관자의 입장을 취할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세간의 올바름 속에서 그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다시금 태고의 생명력을 지닌 ‘몸짓’이 현세를 활보하기 위한 출구를 나름의 부조리적 변증법의 결론으로 제시한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씨알콜렉티브의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이순종 특유의 태곳적 몸에 대한 찬가(讚歌)와 비가(悲歌)가 한데 울려 퍼지고 있는 제단이자 육중한 철제 프레임으로 둘러쳐져 있는 인류 ‘몸짓’의 마지막 보호구역인 〈산〉 그리고 〈축제〉를 만나게 될 것이다. 유태인 대학살 이미지와 진흙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 군중의 형체에 내리꽂힌 침들은 그림자와 재의 흔적에 살이 오르게 하고, 거죽을 입혀 다시금 상처입고 상처를 줄수 있는 몸을 선사한다. 그러나 저 은빛 철책으로 둘러쳐진 마지막 보호구역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 저 몸을 취할 자가 남아 있는가? 저 몸을 두르고 다시금 생명에 대한 모독과 찬미를 되풀이할 백만의 용사들은 그 승리의 잔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이순종 작가는 이 의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수많은 침이 쌓인 채로 거대한 뿔만이 남아 그 옛 형체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 작품 〈전리품〉은 마치 사냥당한 채 거죽이 벗겨진 동물의 사체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뿔은 문명, 그 승전보의 트로피이다. 자연이 주고 인간이 보듬고 보살펴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 포옹으로 약속될 생명력을 구가하는 대신 그 몸 자체를 전쟁과 테러리즘의 제물로 삼아 얻어낸 ‘현실’의 트로피이다. 저 멀리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와 코끼리를 쏘아 쓰러트리는 사냥꾼의 기념비가, 자연의 모닥불을 화려한 콘크리트 화덕에 가둬버린 거실의 벽면을 장식하는 트로피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몸과 그 태초의 몸짓을 끊임없이 사냥해왔다. 때로는 총과 칼로, 때로는 말과 글로 태초의 생명력이 숨 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벌어지는 이 트로피 사냥은 상처를 입히는 것뿐만 아니라, 상처를 입는 행위를 통해 생명력의 포옹을 모독해왔다. 이순종 작가는 인류 ‘몸짓’의 보호구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두에게, 이 모독의 기억들이 전시된 트로피룸(trophy room)을 걷도록 한다. 이는 태초의 몸짓과 생명력의 포옹의 죽음들이 안치되어 있는 묘의 참배이다. 이 참배는 동시에 더이상 사냥당할 부드러운 몸이 없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모든 이즘(-ism)들에 대한 헛된 선전포고이기도 하다. 태초의 몸과 그 생명력에 대한 문명의 남획에 대한 이순종식 애도이며, 저 은빛 제단 앞에서 무릎 꿇을 새로운 용사들을 가리는 모험의 길이기도 하다.

상처 입히는 자, 상처 입는 자 그 모두는 직면한 이즘의 창조와 파괴의 양극성에만 전념한 채, 그 창조와 파괴행위의 몸뚱이는 자신의 이름들과 함께 저 은빛 잿더미의 그림자 속에 숨겨버렸다. 마음과 몸의 이순종식 조어(措語)를 차용한 작품 〈뫔〉 앞에서보자. 익명성의 그림자를 꿰뚫어 보고, 은빛 잿더미 속을 헤쳐 가며 그러모은 ‘몸’과 ‘마음’의 마지막 맥동들이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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