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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ART

아서 자파 이미지 믹싱, 사소한 이미지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연주

글 최윤정

《아서 자파: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러나 기이한 연주들(Arthur Jafa: A series of utterly improbable, yet extraordinary renditions)》 전시 전경

《아서 자파: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러나 기이한 연주들(Arthur Jafa: A series of utterly improbable, yet extraordinary renditions)》
(featuring Ming Smith, Frida Orupabo and Missylanyus) | 2.11~11.25 | 율리아 스토셰크 컬렉션(Julia Stoscheck collection)

흔해진, 그래서 사소해진 이미지는 형상만 남은 채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일까. 재난의 참혹함부터 화려한 매력까지, 이미지가 반복되어 노출되면 초반의 관심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이는 특정 대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끝없는 자가복제와 변형은 개별 대상들을 일반화하여 모두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 사건은 기록된 것 말고는 이야기할 것이 없는 것으로 남고 역사 속 인물의 입에는 재갈을 물린다. 이미지의 포화와 그에 따른 의미 상실은 디지털 미디어와 함께 가속화되었다. 끊임없이 복제되고 변형되는 이미지는 스테레오타입을 양산하고, 동시에 이미지의 포화상태는 보편적 인식 외의 것을 상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디지털 미디어 속 이미지의 아우라 상실이라는 현상은 이미 많은 작업 속에서 재현될 뿐만 아니라 미술 작품 제작 방식이 뉴미디어의 관습들로 코딩되어 작품 자체가 디지털 미디어의 어법을 체현하고 있다. 이러한 미술의 경향과 함께 디지털 미디어에 집중하는 전시 공간도 줄이어 생겨나고 있다.

2016년 베를린에 문을 연 율리아 스토셰크 컬렉션(Julia Stoscheck collection)도 그중 하나이다. 율리아 스토셰크 컬렉션은 본디 2007년부터 뒤셀도르프에서 운영되던 개인 컬렉션이자 전시 공간으로, 시간 기반 미디어(time-based media)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장품 850여 점은 1960년대 영상 작업부터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동시대 인터넷 기반 작업이나 비디오 설치 작업에 중점을 두고 있어 베를린에 문을 열자마자 주목받는 전시 공간으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두 번의 컬렉션 기획전을 선보였고, 개인전은 이번 아서 자파(Arthur Jafa, b.1960)의 전시가 처음이다. 이 전시는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ies)와 협업하여 그곳의 아트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와 큐레이터 아미라 가드(Amira Gad)가 공동 기획하였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기반의 미술 작품들이 디지털 이미지만큼이나 흔해지면서, 미술이 뉴미디어의 존재 방식을 체화하는 대신 매체로서의 자기 변별력을 잃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율리아 스토셰크 컬렉션의 이번 첫 개인전은 디지털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미술 작품이 어떻게 자신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표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미국 미시시피 출생의 아서 자파는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상 감독이자 미술 작가이다. 설치, 렉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지만 그가 중점을 두는 매체는 영상으로, 특히 직접 촬영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떠도는 사진 및 비디오 클립을 조합하여 작품을 제작한다. 유튜브 채널 ‘미시라니우스(Missylanyus)’의 비디오 클립들을 콜라주 영상 재료로 활발히 사용하는 것은 그러한 작가의 작품 제작 방식을 잘 보여준다. 파운드 이미지(found images)를 이용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디지털 이전 아날로그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80년대부터 수집한 이미지 스크랩북 일부를 선보였는데, 수집 대상은 주로 흑인, 특히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미지이다. 아서의 수집은 흑인성(blackness)이 이미지의 유통 하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이미지량은 그 속에서 규정된 정체성이 표피적으로밖에 감지되지 못하는 공허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미지의 범람이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면, 이제는 어떻게 이 밀어 들이닥치는 속도를 고유한 리듬으로 만들어 이미지에 목소리를 부여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는다.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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