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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용, 원숙한 수채화로 풀어낸 한국적인 아름다움

글 백지홍

   고찬용, 〈봄의 향기Ⅰ〉, 종이에 수채, 41×53cm, 2010장르에 따른 구분이 미술에 있어서 의미가 없어진 지도 오래다. 물론 사용하는 재료가 다르면 익혀야 하는 적절한 기술과 지식이 달라지는 만큼 재료의 특성은 작품을 제작하고 감상하는 데 큰 영향을 주지만, 특정 재료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작품 평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에 현대미술이 자리 잡던 초창기의 상황은 그러하지 못했다.

유화와 수채화 등 서양화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수묵을 중심으로 한 동양화와 같은 미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후 서양화가 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후에도 서양화를 대표하는 것은 유화였고 수채화 등은 유화를 위한 습작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여 작품으로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는 한국 근대미술 체제에 큰 영향을 미친 《조선미술전람회》의 역대 수상 결과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근대미술계에서 서양화의 주인공은 유화였다. 이인성 등 소수의 작가만이 수채화로도 일가를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유화와 수채화는 그 기반을 이루는 기름과 물만큼이나 서로 다른 매력을 품은 장르다. 당연히 수채화에 더욱 큰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존재했고, 그 중에는 수채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고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이도 있다. 지난 50여 년간 수채화 작업을 이어온 고찬용 작가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수채화가 고찬용
1950년, 한국사의 중요한 변곡점인 6·25전쟁이 발발한 해 고찬용 작가는 태어났다.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는 1960년대 그는 성장했으며, 문화예술 분야를 비롯해 사회 전 분야가 현대적 틀을 다지기 시작한 1970년대 작가로서 발을 떼었다. 그러니 그의 활동이 그동안 한국 화단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그가 미술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시절 집안 사정으로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대구로 이사 오고 난 이후였다. 새롭게 찾아간 학교의 선생님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장으로 미술에 전념한 그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오늘날까지 화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고찬용 작가는 50년이 넘는 화업을 수채화로 일관되게 이어왔다. 미술대학의 커리큘럼에 따라 다양한 미술 장르와 재료를 접했지만, 그는 자신을 매혹시킨 수채화를 고집했다. 그의 고집은 장발 단속에 걸리는 바람에 자신의 첫 번째 개인전을 작가 없이 개최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 정도 고집이 없었으면 어찌 50여 년 수채화 외길을 걸어왔겠는가.

수채화와 관련한 고찬용 작가의 활동은 창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구수채화협회 회장, 한국수채화협회 이사 및 부회장, 아시아수채화연맹전 조직위원장, 대구수채화아카데미 대회장 등 끊임없이 이어질 듯한 그의 경력은 한국에 수채화 문화를 정착·발전시키고한 노력의 결과다. 그가 수채화 고유의 매력을 강조하고, 국내 수채화 문화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수채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저평가 되어있다면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고찬용 작가는 수채화의 매력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자신의 창작활동을 통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후학 양성, 수채화 조직 운영 등 그의 하루하루는 수채화와 떼어놓을 수 없다. 고찬용 작가는 현재도 사단법인 한국수채화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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