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TOP

COVER ARTIST

유산 민경갑 “예술가의 정체성을 지켜라”

글 백용현

 

11월 9일, ‘한국화의 날’ 선포 1주년을 앞두고 한국화의 날 성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유산 민경갑(b.1933)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2015년 12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제37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한 유산 민경갑 작가는 투병 중임에도 자신을 찾은 『미술세계』 취재진을 반갑게 맞으며 한국화의 날에 꼭 참석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변함없는 열정으로 한국미술의 미래를 염려하는 민경갑 작가는 입이 마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열정이 꿈틀거리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한국 미술계에서 함께 활동하며 알고 지냈고 오랜 기간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던 그와 나눈 대화는 필자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민경갑 작가와의 대화를 정리하여 소개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살아오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 그림을 그린 시절에는 예술가들이 대우를 받지 못할 때일 텐데 어떻게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셨나요?

제가 어렸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의대에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생물반에 들어갔지요. 해부학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그림을 ‘쓱’ 하고 그리니까 선생님이 놀라서 생물반에 있을 게 아니라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때는 공부하는 책들도 마분지에 인쇄한 형편없던 책이었거든요. 당시 대전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버지인 백양 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뵈었더니 “나는 갈 걸세.”라는 거예요. 그래서 “왜요?”하고 물어보니 “여기 한밭이예술가가 있을 때가 안돼.”라고 말하는데 그때는 그 뜻은 모르고 서운하기만 했어요. 그렇게 미술선생도 없이 혼자 그림을 그렸는데, 마침 서양화가 이종학 씨가 대전에 온 거예요.그래서 중구 10번지일 거야, 유곽촌에 방을 하나 얻어서 거주하는 이종학 씨에게 찾아갔어요. 그래서 “제가 화가가 되려고 합니다.”라니까 절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가 꿈이 컸는데 결국은 이 모양이라고, 절대 예술가, 환쟁이가 되면 안된다, 큰일 난다는 거예요. 그때 들은 ‘절대’라는 말이 제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절대 안 된다고? 내가 절대로 화가가 되겠다.”라고 생각한 거죠. 그러다가 당시 서울대학교가 자리 잡은 부산에 가서 시험을 봤어요. 18시간인가를 걸려 화물열차를 타고 갔는데 그게 참 떨어질 시험인데 붙게 되어서 미술의 길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송도에서 시험을 보는데 주제가 ‘육각형 목기에 사과가 5개 있다. 해는 동쪽에 떴다.’라고 제시되었어요. 그걸 그려야 하는데 주변을 보니까 다들 잘 그려요. 그러다가 내 그림을 보니까 해가 서쪽에 떠 있어, 에이 할 수 없다 하고 지우개로 대충 지우고 거칠게 그림을 완성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질감 표현으로 보여서 ‘이것 봐라, 싹수가 있겠는데’ 하고 뽑힌 거죠. 학교에 들어가 보니까 전부 천재들이야. 그림을 다 잘 그려. 그래서 저는 죽어라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추구한 창작의 길은 어떤 길이었나요?

제가 작품에 담고자 한 것이 무슨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자연과 공존하고, 자연으로 들어가자는 무위자연을 추구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추구점보다 어떻게 작품에 임하느냐 하는 자세입니다. 작품이란 게 사실 막연한 거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예요. 또 뭔가 해야겠다고 목표점이 보여도 몸이 나가질 않아요. 반드시 그걸 극복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보면 보고만 있는 사람이 많아. 그렇게 힘든 것이지요. 건강과 나이를 생각하면 욕심이라 하지만, 지금도 작업실에 새 재료들을 사놨어요. 주변에서는 그만두라고 하는데 나 스스로 보기에는 아직 해놓은 게 없고, 가야 할 곳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멈출 수 없는 거예요. 반대로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니까 이제는 그동안의 작업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욕심도 듭니다. 그러다 보니 걱정이에요. 스폰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품을 드려서 정리하는게 뭘 또 욕심부리나 싶기도 하고, 정리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딜레마에요. 오랜 인연을 이어가며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만나게 된 것도 놀라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전시를 제대로 연 것이 1958년 제1회 전람회입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어요. 작가가 비슷한 작품을 계속 만든다는 것은 자기 표절을 반복한다는 겁니다. 끝까지 도전의식이 있어야 해요. 잘 팔리는 작품이라서 계속 그린다고 하면 돈 욕심에 작가정신을 포기한 것입니다. 지금도 10년 전, 20년 전 작업을 똑같이 하는 작가들이 있어요. 창작자가 도전을 해야 하는데 안타까워요

 

오랜 인연을 이어가며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만나게 된 것도 놀라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전시를 제대로 연 것이 1958년 제1회 전람회입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어요. 작가가 비슷한 작품을 계속 만든다는 것은 자기 표절을 반복한다는 겁니다. 끝까지 도전의식이 있어야 해요. 잘 팔리는 작품이라서 계속 그린다고 하면 돈 욕심에 작가정신을 포기한 것입니다. 지금도 10년 전, 20년 전 작업을 똑같이 하는 작가들이 있어요. 창작자가 도전을 해야 하는데 안타까워요.

 

대표적인 한국화가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 미술계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많이 내오셨습니다.

제가 한국화 작가라 그런지, 요새는 한국화가 소외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아요. 그 원인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매에 가보면 스타작가의 그림은 수십억 원, 단원 김홍도의 그림은 1,000만 원 이런데 고조할아버지, 그 고조할아버지가 물려준 작품이 100만 원도 안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 ‘쓰레기다’ ‘버려라’ 하면서 실제로 우리 것을 많이 버렸습니다. 집 구조도 아파트로 변화하면서 기존의 것들이 쓸모없어지기도 하죠. 그러면서 오래된 물건들과 함께 정신도 버린 겁니다. 표면만 존재하고 깊이 박힌 뿌리가 없어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하면 역시 나라의 책임입니다. 국립미술관 하나 있는 것이 국립현대미술관, 컨템포러리 뮤지엄(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입니다. 얼마 전에 영어 이름에 ‘근대’를 붙였다지만(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실험미술이 중심이 된 미술관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위한다며 데려온 외국인 관장은 정작 한국미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 한 채 임기가 끝났어요. 국립미술관이 우리 미술 역사 정립은 뒷전인 것 같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K-POP 문화도 좋지만, 마치 그것만이 한국 문화의 전부인 것처럼 TV를 틀고 어디를 봐도 획일화되었어요. 문화산업이야 경제 논리에 따른다 해도 정부의 정책은 우리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꽃피우게 해야 합니다. 정부 책임이 큽니다.

 

그렇다면 한국 미술의 산증인으로서 우리 미술계에서 발전되었다 싶은 부분과 여전히 부족하다 싶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정말 많이 발전된 부분이 있어요. 화가가 예전처럼 환쟁이 취급을 당하지 않고 직업으로서 대우를 받는 것. 이거 하나만 제대로 발전되었고 나머지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특히 미술 문화 정책에 있어서 전문성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하는데 그게 없어서 안타까워요. 정부마다, 아니 한 정부 내에서도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문화정책이 흔들립니다. 강남스타일,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를 수억 명이 본다고 하면 그 시류에나 편승하려 하지, 자기만의 철학이 없어요. 지난 정권에서 문화융성을 말했을 때 초대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인 김동호 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전화기 사는 거부터 해서 자기 돈 나가는 일만 있다고 해서 그만두라고 했어요. 다른 인터뷰에서도 문화융성정책에 대해 물었을 때도 뭐가 문화융성이 되었냐고 대답했습니다. 오히려 문화를 이용해서 도둑질하려던 것이 지난 정권입니다. 그러면 새로 들어선 현 정권의 문화정책은 어떤가 하면 큰 틀에서 달라진 게 없어요. 사람도 정책도 그대로이고, 장기적 안목은 여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요. 프랑스가 문화강국이 된 것은 나라에서 예술가를 우대했기 때문입니다. 타국의 예술가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요. 우리나라는 자국의 작가도 대우를 안해줍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갔을 때 제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고 소개하자 집주인이 예술원 회원이 들르니 영광이라고 급히 돌아와 환영해주었어요. 그런데 한국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술원이 1954년에 법정기관으로 창설되어 60년이 훌쩍 넘어가는데 방치되어 있어요. 예술원 회원으로 인정되어도 국가 차원에서 예술가를 어떻게 예우하겠다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청문회에서 법원이 제 그림을 비싸게 사도록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어요. 그때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한 의원이 야당임에도 ‘예술원 회장의 그림이 평가절하되어 오히려 싸게 산 것’이라고 반박했어요.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의식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화단에 많은 변화를 이끄시기도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문제들을 고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 첫째가 도제식 교습법입니다. 세상은 변화하는데 도제식으로 선생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것은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예전부터 있었어요. 학생 때도 그대로 베껴 그려오라는 선생의 말을 듣질 않았어요. 그래도 다행히 학점을 받았습니다(웃음). 그 이후로도 도제식 교육법 타파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둘째가 호수법의 정착입니다. 예전에는 한국화는 반절, 삼분지일, 사분지일 이렇게 크기를 말했어요. 국제성이 전혀 없잖아요. 저는 한국화의 화폭도 호수로 해야 국제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당시에는 죽일 놈, 돈밖에 모르는 놈이라고 욕도 많이 먹었죠. 셋째가 한국화의 추상화를 이끌었어요. 마티에르가 한국 화단에 유입될 당시 우리 것도 저러한 역동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 연구를 시작했어요. 한국화에는 내가 추상화 1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지막 네 번째로 한국화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해요.

 

한국화를 살려야겠다는 내용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항상 주장해온 것은 ‘과연 우리 한국화가 이대로 침체되어도 되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현대미술에서 장르가 어디 있으며, 회화라는 것이 모두 같지 않은가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모두 같다 하더라도 자세히 보면 인종에 따라 생김새가 다르고, 더 자세히 보면 비슷하게 보이는 한국, 중국, 일본도 언어, 습관, 문화가 달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장르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것은 어떤 장르가 더 낫다, 더 나쁘다 하는 위계가 사라졌다는 것이지, 그 정체성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독창적인 정체성을 키워왔어요. 고분 벽화 등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 그림을 좋아했던 안평대군이 미술을 지원하고, 겸재 정선 때에 이르면 우리 미술이 높은 수준을 보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것의 맥이 끊기고 문화가 낙후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은 사라지고 선배 그림을 모방하는 도제식 그림만 남아요. 그래서 1917년에 우리 미술 발전을 위해 ‘서화협회’를 만들었는데 조선의 자체적인 움직임을 본 일본에서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되니까 많은 돈이 투자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조선 화가들이 많이 참여했어요. 당시 기록에도 ‘아니 쓸개도 없지, 전날까지 일본 욕하던 사람들이 일본 전시에 참여한다.’라는 비판이 있어요. 해방을 맞이한 후에도 이념 갈등으로 사회가 아주 혼란스러웠어요. 그나마 정부가 들어서고 조금 안정이 되니까 사람들이 유학을 갔어요. 그래서 서양의 생각, 사상, 논리를 흡수해 왔어요. 우리 것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우리 것이 다 없어졌어요. 마티에르, 표현주의가 국내에 유입되었고 앵포르멜이 큰 주목을 받은 1960년대에는 저도 매력을 느껴서 그러한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8년 정도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내가탄 말이 서양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정말 나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호가 ‘유산(酉山)’ 즉 닭산이고 고향이 계룡산(鷄龍山)이니 이왕이면 산부터 그려 보자 해서 열심히 그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 산이면 산, 잉어면 잉어 한 가지만 그려야 캐릭터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소재를 그려도 작가의 정체성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는 우리가 나고 자란 한국의 얼, 민족,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에요. 나는 그것을 항상 주장해왔는데, 그게 없어졌어요

 

선생님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한국화의 부흥을 위해 작년 ‘한국화의 날’을 선포하고, 올해도 관련 활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화의 날을 함께하는 작가들은 우리 것을 알리고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모인 것이잖아요. 백지장도 만들면 났다고 했어요. 뜻이 같은 이들이 함께해야 합니다. 그러한 모임이 계기가 되어서 우리 전통의 장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국화에는 특유의 정신이 있고 재료가 있어요. 같은 수용성 재료라 해도 아크릴 물감으로는 먹이 스며들고 번지는 맛을 낼 수는 없어요. 먹이라는 재료의 특성이 한국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다른 재료로 형태를 흉내 내려고 해도 표피만 가져오는 것이지 본질을 가져올 수 없어요. 재료의 특성이 작가의 태도에 영향을 주고, 은근함과 끈기가 있는 작품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그것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주목받는 액티브한 것과는 다른 가치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양 옷을 입어도 우리 체형과 기후, 풍습에 맞게 변형시켜서 입지 않습니까. 서양의 것을 우리에게 맞게끔 하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서양인이 입는 옷을 그대로 사 입으면 전체적인 맵시가 안 나고 어딘가 어설퍼집니다.

 

미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열정을 가지고 임하십니다. 언제나 가르침을 주시고, 원로작가이자 예술원 회장이라고 ‘난 달라’라는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 텐데 선생님은 늘 어려운 작가들과 함께하셨어요. 그렇기에 생존 작가가 존경받는 일이 드묾에도 선생님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내가 좋은 점은 유머가 많아(웃음). 동양에서는 60세 이후에 다시 나이를 센다고 해서 작년에도 저를 스물다섯이라 소개했잖아요. 나이만 많다고 대우받으려 하면 안 됩니다. 흔히 권위를 세운다고 하는데, 억지로 세운 게 무슨 권위입니까. “내가 권위 있다.” 이게 무슨 말이 되겠어요. 어른이 되면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중 ‘예도’, ‘학도’, ‘품도’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도는 후배들도 선배같이 대하라, 대접받은 만큼 해주는 법입니다. 학도는 솔직히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나이를 먹을수록 공부해라. 그리고 품도는 베풀어라. 베풀지 않으면 안 돼요. 남을 시기하는 것은 자기가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다른 작가와 비교할 때 상당히 여유롭고 풍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제가 옆에서 본 선생님은 치열하게 사셨거든요.

예전에 셋방살이할 때, 질감을 실험한다고 침봉으로 찍어서 작업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끝내고 보니까 방바닥이 온통 구멍투성이라 없는 형편에 새로 사다 붙인 것이 기억이 나요. 제가 한 가지 생각한 게 있는데, 자서전을 안 쓰려고 합니다. 사실대로 쓰면 전부 부모님 욕만 쓸 거 같아요. 고생도 많이 했고. 미화해서 쓰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차라리 다른 분이 제 작업세계에 대해 써주시는 것이 제겐 더 좋은 일 같아요. 저는 없이 살 때도 마음이 풍족하고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돈이 없던 젊은 시절부터 부잣집 아들로 아는 사람도 있고 그랬어요. 식당가서 돈내기 싫어서 괜히 신발 끈 묶고 그렇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신념이 있어요. 있는 놈한테는 안 사주는 것이랑, 쌀이 떨어져서 죽을 먹고 있어도 친구가 오면 같이 밥을 먹는 것. 그러다 보니 아내가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바느질도 하고 별일을 다 했습니다.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작가라는 자존심과 긍지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전기밥솥을 하나 잘 만들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작가는 하나 창작했다고 평생 먹고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가야 합니다. 예전에 한 화랑에서 저에게 “유산이 잘하면 성공하겠는데, 딸린 식구가 너무 많아 그것을 끊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는 그렇게 못 하겠다.”라고 했어요. 죽든 살든 끝까지 가보는 게 예술가죠.

 

세상에는 여러 직업이 있는데 선생님은 평생 화가로 사셨습니다. 혹시 다시 태어나도 화가로 사시겠습니까.

나이가 들다 보니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인데, 그건 모르겠어요. 그때 가봐야 알지(웃음).

 

민경갑 〈永劫의 命 18-5〉 화선지에 먹, 채색 112×162cm, 2018

THIS DIRECTORY

THIS 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