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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무엇을 해야만 할까? (What Ought To Be Done?) : 노동과 유희, 현실과 가상의 삼투

글 곽영빈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 10.27~4.7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하룬 파로키,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Workers Leaving the Factory in Eleven Decades)〉, 2006 Photo: Harun Farocki GbR Berlin

라디오 방송용으로 쓴 카프카에 대한 글에서, 발터 벤야민은 카프카를 오독하는 가장 그럴듯한 ‘첩경(捷徑)’으로 종교적인 독해를 든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성』은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신적인 존재,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과 은총의 영역을 그리려 했던 것이고, 『소송』은 그것의 세속적인 번안이라 할 법정 세계에 대한 묘사이며, 『아메리카』 역시 구원의 소망을 잃어버린 존재인 인간의 현실을 ‘신학적’ 시각에서 관찰한 것이라는 식이다.
우리에게 드디어, 혹은 이제야 찾아온 하룬 파로키의 한국 회고전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7전시실 전체를 열여섯 개의 스크린으로 빼곡히 채운 〈노동의 싱글 숏(Labor in a Single Shot)〉(2011-2017) 시리즈를 오독하는 가장 빠른 첩경이, 이를 ‘세상에 널린 다양한 직종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보는 것이라면 말이다. 혹은 바로 옆 미디어 랩 실 초입의 2채널 작업으로, 벽돌과 집을 말 그대로 맨손으로 만드는 아프리카나 인도 노동자들과, 첨단기계로 거의 완성된 벽돌벽을 그저 이어 붙이는 유럽의 노동자들을 번갈아 보여주는 〈비교(Comparison by a Third)〉(2007)가 후진국과 선진국 간의 기술력 차이를 ‘비교’하는 게 아니라면? 또는 뤼미에르 형제의 유명한 1895년 영상부터 D. W. 그리피스와 찰리 채플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스트라우브/위예 부부를 거쳐, 라스 폰 트리에의 2000년 작업(〈어둠 속의 댄서〉)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들에서, 말 그대로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등장하는 11개의 장면들을 취합한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Workers Leaving the Factory in Eleven Decades〉(2006)이, 각 시대를 대표하는 노동자들의 이미지를 연대기적으로 모아 각기 다른 모니터로 보여준 게 아니라면?
‘좋은 옛 것이 아니라 나쁜 새 것에서 출발하라’는 브레히트의 유명한 격언을 ― 벤야민이 감탄했다는 이유만으로 ― 무턱대고 외울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좋은 옛 것’의 그럴듯함, 위처럼 상식적인 독해들이 이렇게 ‘공회전’하는 지점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리 애기해두자면, 이것이야말로 파로키 작업의 출발점이자 가장 빠른 우회로이다.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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