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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고통과 위안, 그리고 흥분

글 윤민화

변상환: 몸짓과 흥분과 짧은 역사 | 10.25~11.25 | 스페이스 소

 

변상환, 《몸짓과 흥분과 짧은 역사》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스페이스 소변상환 작가가 직접 쓴 쪽글에는 20킬로그램의 형강과 비슷한 무게의 누름쇠를 한꺼번에 조금씩 옮겨가며 작업을 완성했다고 쓰여있었다. 아이고. 본능적으로 곡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내 첫째 아이가 16킬로그램, 둘째가 14킬로그램이다. 내가 조금은 안다. 그 무게가 신체에 가하는 고통을. 아이들을 한 번에 두 팔로 안고, 녀석들 발끝에 물감을 묻혀 1센티씩 옮겨가며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괜히 또 한 번, 아이고. 신음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달은 진리가 있는데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빨간펜으로 밑줄 그어 놓은 조간신문에는 미래엔 기술이 인간의 신체를 해방시킬 것이라고 볼드체로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내 손에 쥐어진 아이폰만 봐도 미래란 게 이미 내 앞에 와 있다는 건 알겠지마는, 이놈의 몸뚱이는 결코 편해지는 법이 없다. 시간은 또 어찌나 빠른지. 이제 세 살, 네 살이 된 내 두 아이에게 24시간이란 까마득하겠지만, 나는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써도 모자란다. 이십 대때만 해도 인생이 이런 줄은 꿈에도 몰랐지. 삼십 대가 되고 아이들이 생기니 뭐 하나 하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하고, 무진장 애를 써야 하며, 엄청난 육체적 고통의 대가가 뒤따른다는 걸 매순간 깨닫는다. 몸도 마음도 쪽을 못 쓴다.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기어코 해내고 마는 숙명이란, 필연적으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변상환 작가가 40킬로그램의 재료를 들어 옮기며 종이 위에서 벌인 투쟁은 어떠한가. 종이에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이 이렇게도 고통스러울 일인가.
그런데 말이다. 참 신기하게도, 그 고통이란 게 때로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내 몸에 규율을 가하고 통제함으로써 따라오는 고통과 정해진 시간 안에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험 같은 거 말이다. 세포와 근육에 불이 붙듯 기어코 끝장을 보겠다고 이를 악무는 순간. 사실, 이런 순간엔 자양강장제가 필요 없다. 창작하는 삶이란, 이 고통을 위안 삼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창작이란 무진장 막막한 일일 테다. 그 막막함과 싸우며 무언가를 새롭게 쓰고, 만든다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일터. 그러나 그 고통이 위안이 되는 지경, 말장난 같은 이런 상태를 품고 사는 일. 여기에서 이상한 동력이 생겨 기어코 해내고 마는, 그런 삶. 어릴 적에 김현 평론가의 글을 참 좋아했다. 그중에 「책 읽기 의 괴로움」이었던가, 흐릿한 기억에 의존하여 되새겨 본다. 세상은 책 속에서처럼 선명하지 않다고. 분명하지 않은 세상에서 분명하게 살 수 없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숙명. 그것을 김현은 방황이라고 썼고,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속하지만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글. 그런 글을 쓰고, 읽는 괴로움. 이번 변상환 작가의 작품들도 그러했다.

고통과 위안, 그리고 흥분. 평면 위에 엄격한 통제 속에 이루어진 말끔한 얼굴의 작품들을 보면서, 오히려 그 종이 바깥의 장면들을 상상하며 그 짜릿함에 이입하게 되는 감상 포인트는 이 역설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몸짓은 어떠했을까, 그 흔적은 어디에 어떻게 남겨졌을까. 100×70센티미터의 평면 안에 미리 염두에 둔 궤적을 좇으며, 숨 막히게 기민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을고통의 순간이 아주 상상되면서도, 괜히 또 궁금하다. 발끝까지 긴장했을 작가의 움직임을 실제로 보고 싶고, 몸의 모든 기관들의 세세한 움직임을 기록하고 싶다. 이 성실한 작가의 말마따나, 성난듯 불붙었다 금세 식어 버릴 성 불이 되어 형강과 누름쇠를 들고 계주하듯 내달렸을 종이 위에서의 시간을 보고 또 되감아 보고 싶더라. 형강과 누름쇠를 마지막으로 옮긴 직후, 탄식하듯 내뱉었을 신음과 비로소 허리를 폈을 때의 그 안도가.
시를 찬양하고, 시인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하나로, 때로 어떤 작품은 시구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행간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이 적갈색의 붉은 표면도 그러했다. 비록 촘촘히 서로에게 기대어 틈 없어 보이지만, 나에겐 하나의 흔적과 그 다음의 흔적, 그리고 그 다음과 다음으로 이어지는 행렬에서 시처럼 공간감이 느껴졌다. 하나의 시어는 백과사전과도 같을 때가 있다. 한 단어를 읽고도 무수한 은유를 꺼내어 볼 수 있는 시와 마찬가지로, 4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형강과 누름쇠의 달음박질은 평면과 조각, 통제와 고통, 명사와 동사, 예술과 노동, 퍼포먼스와 기록 같은 연관어를 제시하고 있었다. 표면이자 공간인 역설. 가만히 있지만 움직임을 붙든 상태. 가벼운 결말이지만 분명 무거웠을 과정. 여러 질문도 따라온다. 형강이나 누름쇠를 드는 손은 예술하는 손인가, 노동하는 손인가. 평면은 움직임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없)는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전시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평면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굳은살 박인 손으로 달랑 와이어 몇 개에 작품들을 대롱대롱 매달아 뒀다. 말끔한 얼굴을 한 작품들 뒤로 가벼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명사 같지만 동사임에 틀림없는 표면들. 그 가벼운 농담 같은 작품들이 오늘 내 삶(이라 쓰고 고통이라 읽는다)을 위안한다고 느꼈다면, 너무 과하다 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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