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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진 것들의 동력

글 이유성

이유성, 〈Testing〉, 나무조각(액자와 야생꽃묶음, 무화과와 과도, 고양이 그림과 랩탑, 복, 꼬마전구 장식, 핼러윈스노볼, 바람개비, 헵워스의 ‘Figure’에 이입하는 개, 겹쳐진 세 하트, 블루베리 포도 딸기를 집게발로 잡는 꽃게의 표면을 오래 바라봄)과 결합한 49인치 TV, 철, 비디오, 5분, 2018 사진: 김주원

작년 이맘 때 가족들이 급하게 도쿄로 이사를 간 후, 모든 짐이 잠시 남아있던 집에 가서 오래도록 머문 날이 있었다. 사물들만 남은 차갑고 정지된 실내. 그것은 이미지들이 우리라는 각기 다른 통로를 거쳐 무한히 옮겨가고 돌아온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키는 묘한 시공간이었다. 그간 꽤 신선하게 비틀린 것이라 여기며 내가 만들어내던 많은 것들의 원형이 그 곳에 있었다. 동물 형상의 작고 세밀한 기념품 조각들, 둥글고 또 각진 변을 가진 가구들, 벽지 위에 걸린 액자들, 선물 받은 행복이나 우정 혹은 좋은 삶에 대한 영어 구절을 담은 십자수, 목가적인 그림들이 그려진 접시 위 말라가던 과일의 껍질과 씨앗들. 그 모든 질감들이 너무 친밀하고도 실제적이어서 두려웠다. 나는 한참 동안을 전자음악과 동시대 트랜스 휴머니스트들에 대해 저술한 책에 매료되어 있었고, 차가운 톤으로 플랫하고 속도감 있게 그려나가는 드로잉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이 광경은 내가 어두운 집에 홀로 머물며 그 실내의 색깔, 질감, 명암과 양감을 눈으로 아주 천천히 쓰다듬게 만들며 눈의 인식을 다시 쌓게끔 했다. 그것은 내게 흉터처럼 각인된 감각들이 맞았다. 내게서 나오는 것들을 종종 미지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들은 비로소 나의 오랜 사료(史料)들이 되었다. 이를 인정하고 나는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얼마 전 작업실 문을 열고 〈Testing〉(액자와 야생꽃묶음, 무화과와 과도, 고양이 그림과 랩탑, 복, 꼬마전구 장식, 핼러윈스노볼, 바람개비, 헵워스의 ‘Figure’에 이입하는 개, 겹쳐진 세 하트, 블루베리 포도 딸기를 집게발로 잡는 꽃게의 표면을 오래 바라봄)이라는 나무 프레임 조각을 TV와 결합해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내보일 수 있었다. 제목에 적힌 대로 여러 종류의 상을 부조로 새겨 넣은 이 피스에는 6개의 구멍이 뚫려있다. 이 네거티브 공간을 통해 이 작업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들이 화면에서 운동한다. 컴퓨터가 이미지들의 뼈만 남기듯 양감을 누락시키고 잡아낸 1point 굵기의 선들. 그것들은 어떤 기억의 모습들이 그러하듯 구조를 겨우 식별할 수 있도록 앙상한 선만 남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내가 가진 평면에 대한 강박 때문에, 이것들이 프레임에 고착될까 걱정했다. 이번만은 그것들이 기념되거나 포착되지 않고, 틀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길 바랐다.

창에 드는 빛이 바삭바삭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깎여 나간 나무의 표면을 해가 질 때까지 맨 눈으로 더듬었다. 무언가 이미지가 되기 위해 깎여 나간 자리들은 흉터로 뒤덮인 듯 보이기도 했다. 내가 쓰는 질료가 흉터인가 싶을 정도로. 그렇게 흉터들을 곱씹던 시간에서 나온 이 피스들은, 다른 화면을 향해 몰두하는 몇 명의 여자들이 있어 즐겁게 만들 수 있었다. 내게서 도무지 잊히지 않는 몇 가지의 이미지들이 그렇듯 당신을 잠시나마 다른 곳으로 이끌고 싶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교착상태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느낀다. 이제 망각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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