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TOP

REVIEW

시대착오의 애도를 수행하는 메타 정원술

글 남웅

이강승 : Garden | 11.22~12.22 | 원앤제이갤러리

이강승, 〈Garden〉, 3채널 컬러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가변크기, 2018 이미지 제공: 원앤제이갤러리미국에서 활동해온 이강승의 국내 첫 개인전 《가든》은 HIV/AIDS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영화감독 데릭 저먼(Derek Jarman, 1942~1994)과, 같은 이유로 세상을 떠난 국내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회원이자 HIV/AIDS 활동가 오준수(1964~1998)를 주요 키워드로 삼는다. 올해가 오준수의 별세 20주기이고 전시기간 중 ‘세계 에이즈의 날’(12월 1일)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시를 통해 HIV/AIDS 의제와 애도의 의미를 접목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다.
전시는 데릭 저먼을 호출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준수를 소환한 배경 역시 언급하지 않는다. 전시장에는 데릭 저먼의 감수성이 집약된 영국 켄트지역 던지니스(Dungeness) 바닷가에 위치한 정원의 공간적 의미와 시적 정취를 빌어 오브제와 드로잉, 영상이 배치된다. 작가는 데릭 저먼의 정원과 종로의 오랜 게이 크루징(cruising) 장소 중 하나였던 탑골공원을, 오준수의 기록과 그에 대한 기억들을 전시장 위에 엮어낸다. 데릭 저먼의 개인사에 천착하기보다 정원을 빌려와 간접화법을 구사한다면, 오준수에 대해서는 그의 필치와 출판물 등 구체적인 기록을 모아 놓고 얼굴을 전면에 드러낸다. 이는 드로잉에 있어 보다 강조되는데, 데릭 저먼이 얼굴이 지워진 정원 의자 등 지워진 표상으로 인지되는 것과 대비적으로 오준수의 초상은 치밀하게 재현된다. 오준수의 편지를 160×120cm 화면에 확대한 드로잉은 흔적을 좇는 작가의 태도와 더불어 편지를 소재 삼은 작업이 누구를 송신인으로 두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한다.
작가는 정원에서 가져온 조각 파편들과 꽃들을 전시장 곳곳에 배치하는가 하면, 정원의 돌멩이를 탑골공원 나무 둥치에 얹어 놓은 사진을 걸어 과거의 장소를 복기한다. 〈무제(정원)〉에서 삼베에 니시진(Nishijin, 西陣) 금사로 데릭 저먼의 가든북 기록을 수놓아 필사하고 정원의 파편들을 뿌려 놓는가 하면, 또 다른 〈무제(테이블)〉는 수놓인 삼베 위에 정원의 돌멩이와 꽃잎을 올리고 그 주위로 오준수의 기록을 모아 놓는다. 일련의 배치는 정원의 공간적 함의를 작업과 전시장에 옮겨놓은 모습이다. 바느질과 드로잉은 흔적을 좇는 행위에 다름 아닌 은유적 기술인 바, 각각의 공정은 기억을 담고 섞는 정원술에 가깝다. 이는 형상을 기록하고 동시에 뭉개는 흑연의 질감과, 작가가 머무는 캘리포니아와 탑골공원의 흙을 섞어 빚은 도자기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그렇다면 그의 필사적인 필사(筆寫)작업에 소요되는 집중의 시간은 무엇을 향하는가.
전시에는 오준수의 서사적 기록과 정원이라는 추상화된 장소성이 결합한다. 기억의 소재를 뿌려놓거나 수놓은 삼베천은 전시장에 덧씌워진 정원의 알레고리적 유비이다. 다시 말해 정원은 물리적인 공간이기에 앞서 정동이 섞이는 공간, 시간의 결이 혼재하고 타인의 서사가 개입하는 공간, 일종의 개념적 플랫폼으로 작동한다. 정원을 통해 오준수를 품는 방식, 혹은 오준수를 기억하기 위해 데릭 저먼의 정원술을 가져오는 방식은, 데릭 저먼의 뉴 퀴어 시네마가 당시 90년대 한국의 시네필 성소수자와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울림을 줬던 기억을 소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정원의 기술을 좀 더 밀고 나간다. 가령 서울과 던지니스에서 땅을 파고 흙을 삼베 보따리에 담아 구덩이에 드로잉을 잘라 묻는 퍼포먼스 영상 〈정원〉은 일종의 샤머니즘 의식을 연상시킨다. 다만 그것은 존재의 흔적을 기억하고 호출하기보다 부재의 기호를 통해 다시금 부재를 복기하는 행위, 기억하는 방법 자체를 기억하는 행위에 가깝다. 삶이 지워진 자리에 죽음과 부재까지도 빈자리로 표시하는 행위는 삶과 죽음의 구분 너머 다른 시간을 소환한다. 그것은 말년의 데릭 저먼이 정원을 통해 죽음 이후 다른 누군가가 (설령 새와 짐승, 바람까지도) 열매를 옮기고 꽃을 피우리라는 불가지적 시간을 떠올린다.
일련의 작업들로 예의 (비)시간을 수행하는 공정은, 과거를 보존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선적 세계관보다 완료할 수 없는 애도를 애도로서 수행하는 행위, 대상과의 조우 불가능성 주위에 기억의 편린들을 펼쳐내 뒤섞는 것에 가깝다. 하여 작가가 기억의 파편들을 전시장에 배치하고 가꾸는 행위는 죽음 이후의 시간을, 주체의 시간이 소거된 (비)시간성을 가리킨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관통하는 전시장의 공간을 정원 가꾸듯 배치하고 기억의 기술을 펼쳐 놓는다. 이는 애도의 행위로 접근되었던 기존 에이즈 위기의 미술에 대한 동시대적 재창안이라는 시도로 접근할 수 있다. 가령 삼베 위에 펼쳐지는 정원술, 전시장 위에 펼쳐지는 애도의 기술은 1987년 미국에서 시작된 〈에이즈 메모리얼 퀼트(AIDS Memorial Quilt)〉와 비교 가능하다. 질병으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클리브 존스(Cleve Jones)의 ‘네임프로젝트’가 조직한 작업은, 당시 레이건 정부의 침묵 속에 망각되는 질병에 의한 재난을 시각적으로 타개하고자 했던 집단적 저항행위이며 동시에 워싱턴 광장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것이었다. 작가는 퀼트의 해석과 교감하면서도 다른 결을 벼리는데, 특정 인물에 대한 기억과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리기보다 정원과 아카이빙의 공간적 함의를 바탕으로 흔적이 기억되는 방식, 기억을 전시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이는 변화한 상황 위에 애도와 기억의 형질전환을 보여준다. 서구 몇몇 국가에서 HIV/AIDS 예방약이 상용화되고, 꾸준한 투약이 감염인의 바이러스 검출율을 0에 수렴케 하여 전파하지 않는다는 ‘U=U(Undetectable(바이러스 수치 미검출)=Untransmittable(감염불가))’의 구호가 국제사회에 공표되며, 감염 이후에도 비감염인과 다르지 않은 예상 수명을 누리게 된 오늘에 이르러 에이즈 위기의 긴박하고 급진적이며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애도보다는 우울의 시간을, 빈자리를 구태여 다른 의미와 표상으로 봉합하기보다 표상을 통해 텅 빈 시간 자체를 노출하는 것에 가깝다. 비어 있는 시간과 애당초 이를 봉합하려는 희망과 집착과 냉소를 내려놓은 치밀한 표상들 사이 정동의 간극은 동시대 여전히 취약하고 비가시화된 얼굴들을, 시대착오적이고 선적 시간의 질서에 밀려난 이름들을 소환하고 엮어낼 가능성을 열어 둔다.
작가가 전유하는 정원술이 망각과 기억으로부터 무언가를 지금 여기에 옮겨내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 시간성에는 어떤 이름과 시점을 붙일 수 있을까. 전시를 통해 그가 몸담은 단체가 오랫동안 보관해온 기록을, 동료 활동가들의 기억을, 그들이 보인 기억에의 의지를 읽는다. 관객들은 오준수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아카이빙 자료와 때묻은 출판물, 스크랩북을 모아 놓은 작가의 테이블에 한 번 더 시선을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전면에 걸어 놓은 ‘오준수오창호김경민김다빈루까종로바닥의걸레’ 네온사인에 시선이 한 번 더 향한다. 오준수를, 오준수의 그림자를 기억하는 시간은, 그가 스스로를 호명하고 타인에게 선물 받은 이름처럼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다.

THIS DIRECTORY

THIS 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