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TOP

REVIEW

시간을 생각하는 시간

글 박수지

스페이트-포인트 state point | 11.15~12.9 | 산수문화

《스테이트-포인트》 전시 전경, 2018 사진: 김익현, 이미지 제공: 노해나과거에 접근하는 일은 쉬이 한계에 부딪히곤 한다. 이편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순간 그 과거는 아카이브 되거나, 재현되는 그 자체에 의미를 담보 잡히는 일이 잦다. 카테고리화, 상품화, 대상화 등의 방식으로 급격하게 현재로 소환된다. 어쩌면 과거란 미처 접근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정보가 이미 생겨버린 어떤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시간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과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일까? 많이 아는 것은 과거에 더 정확히 접속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우리는 종종 과거를 ‘정보 과잉’의 상태로, 미래를 ‘알 수 없음’의 상태로 규정한다. 둘 다 파악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셈이다. 이 둘 사이에 현재가 쉴 틈 없이 과거를 복기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빈번히 미끄러진다. 노해나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 《스테이트-포인트state-point》에서 강신대, 김익현, 최윤 세 작가의 ‘스테이트-포인트’, 즉 국가적이고도 개인적인 ‘상태’를 사유하는 세 가지 ‘관점’을 보여 준다. 이때의 과거는 80년대 출생 작가들이 복기하는 90년대이기도, 모호한 세계에 접근하는 태도이기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을 지배하는 공통 감각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강신대는 우리가 무수히 반복해왔던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일’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이를테면 사회적 함의를 가진 과거의 상징을 재현하는 일만큼은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섣부르게 지난 시간을 추앙하거나, 아카이브라는 수단으로 부분을 일컬어 전체를 대변하기를 거부한다. 기억하기의 곤란함과 빈곤함을 다루며 반(反)아카이브적 방법론으로 작업을 해왔던 강신대는 이번 작품 〈As You Know〉에서 시간을 사유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전시장에는 매끈한 아크릴 쇼케이스가 세 개 놓여있다. 안에는 각각 사용한 흔적이 가득한 낡은 목장갑, 예부터 집 현관 천장에 매달아놓던 명주실 뭉치, 녹슨 낫 한 자루가 정확히 쇼케이스의 한가운데에 진공상태처럼 매달려 있다. 이때의 쇼케이스는 여느 샵에서 볼 수 있는 쇼케이스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며, 동시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쇼케이스의 목적과도 결을 달리한다.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공감능력이 뛰어난 관람객이라면 세 가지 사물 사이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도무지 그 출처와 관계를 알 수 없으며, 갖고 싶지도 않고, 개별적인 기억이 담긴 것도 아닌 사물(thing)이 그 자체로 눈앞에 있는 광경은 시간을 사유하는 길목에 훼방을 놓는다.
김익현은 과거를 볼 수 있는 방식을 구상했다. 〈Phase-retrieval〉은 1995년 구 중앙청,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후의 잔해를 찍은 동일한 사진을 틀린 그림 찾기 이미지처럼 배치했다. 두 쌍의 이미지는 서로 같은 듯하면서도 어긋나있다. 김익
현이 그간 사진을 통해 과거의 모뉴먼트를 다뤘던 맥락보다 모호한 ‘스테이트-포인트’다. 이후 나오는 영상 속 일본인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본관에 진열되어 있던 미륵보살을 회고한다. 일본인 말고는 이 미륵보살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문화재 보호’의 기쁨을 만끽하며 광복 직전에 서둘러 미륵보살을 옮겼다. 기념비적인 상황과 기록될 만한 증언만이 과거를 서술하는 통념들 사이에서 김익현의 시선은 아버지가 찍은 가족사진(〈Further〉)조차 작가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우주의 빛, 즉 과거를 대면하는 작가의 시선은 초점이 안 맞는 우주망원경의 오류값에 정확히 들어맞는 거울을 설치했던 허블망원경식 해결책(〈Negative phase〉)과 교차된다. 90년대라는 묘한 흥분의 시대는 흔적만 남아있는 어긋난 이미지와 옛날 사진 표면의 먼지를 통해 부정확한 역상의 이미지를 반사시킨다.
최윤의 〈공포(국)가도〉, 〈공포의〉는 한국의 주거형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무늬 포인트 벽지, 플라스틱 야광별 스티커, 노란 장판, 붉고 화려한 카펫과 같은 ‘미니멀하지 못한 공포의’ 인테리어를 화이트 하이그로시(high glossy) 시트를 붙인 〈외(국)미삼면도〉와 극단적으로 대치시킨다. 이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혐오하는 사실, 즉 미국이 되지 못하는 불행 또는 북유럽 디자인이 되지 못하는 불우한 진실을 전유하는 사물들이다. 최윤이 아카이브한 공포물들은 근과거의 역사가 끝없이 제시해왔고, 동시대에 더 만연해지고 있는 불안과 결핍의 응축을 보여주는 프레임이 된다. 최윤의 또 다른 작품 〈창문그림액자 E타입-끝없는 한적한 도로와 USB〉가 소실점 너머의 풍경에 대한 혹은 USB안의 내용에 대한 관람자의 시선을 가늠해보듯 우리가 지각하는 시공간은 이미 공포로 인해 맹점만 가득한 곳일지도 모른다.
최근 시간을 어떻게 사유할지, 과거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논의가 부쩍 늘어났다. 그만큼 동일한 시간에 쌓이는 정보의 양이 늘어난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어떤 기로에 놓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기로는 아무래도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에게 가장 정치적인 부분이 된다. 어떠한 과거를 확실한 권위로 남게 할 것인지, 비판적으로 사유할 지점을 남겨놓을지를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정 시간에 대한 정동을 무시간적으로 느끼거나 또는 그 반대일 경우 모두 동시대인임을 반증하려는 강렬한 욕구로부터 출발된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인지하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간이야말로 가장 비범하고 강력한 메타포라고 여기는 것 또한 동시대인의 특징이 아니던가.

THIS DIRECTORY

THIS 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