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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협곡, 석양, 하얀 입방체로부터

글 이양헌

《Double Negative: 화이트 큐브에서 넷플릭스까지》 | 2018.12.19~2019.2.3 | 아르코미술관

이주리, 〈선셋 벨리〉 웹 어플리케이션, 실시간 생성, 2017-2018, 이미지 제공: 아르코미술관

 

0.

그것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협곡(峽谷)을 횡단하는 점유와 귀속, 배치의 문제이다.

1.

지반의 융기로 솟아난 양극단의 곡벽. 하나의 봉우리는 고요한 침묵과 하얀 벽체, 균질한 인공조명으로 이루어진 구조체로 정의된다. 그것은 원래 중립의 지대 위에 세워진 신전이자 교회, 법정인 동시에 실험실이었으나 이데올로기와 공모하는 태형리(笞刑吏)였음이 드러나면서,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응전하는 치열한 전장(戰場)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유비에서 이곳은 오직 특별한 순간에만 문을 여는 방주로서, 미술이 돌아갈 마지막 안식처를 제공해왔다. 반대편의 가파른 봉우리는 뤼미에르(Lumière)의 은하계 바깥에서 발흥한 이질적인 공간으로, 디지털로 축조된 극장을 부르는 미래의 이름이다. 어둠의 입방체를 빠져나온 관객들은 스크린의 편재성 사이를 순례하다가 이 비옥한 플랫폼으로 빠르게 안착하는 중이다. 이곳은 고전적인 관람 조건과 시네마-서클의 지층을 와해시키는 불안한 진원지가 아니라, 사실은 기술과 인식이 무한히 재조정하며 공진화해 온 이미지의 근원적인 장소를 환기시킨다.

2.

수렴되지 않는 대칭축으로부터 발생한, 심도를 가늠할 수 없는 협곡 사이에 《더블 네거티브: 화이트 큐브에서 넷플릭스까지》가 자리하고 있다. 고대의 유적을 닮은 이 특수한 지형 안에서 정착과 이주, 그리고 귀환을 예비하는 미술의 궤적들이 어지럽게 얽혀있으며, 골짜기의 깊은 곳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질문들이 출몰한다. 오늘날, 미술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빠르게 쇠락하는 화이트 큐브를 대신해, 미술은 광활한 데이터-순환에 참여하는가? ‘지금 여기(now-here)’라는 미술의 역사적 장소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진과 같은 특정한 매체에 의해 경험되어 왔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전시장으로 입장하게 될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우리가 장소 특정적 미술의 계보를 통해 알게 된 하나의 진실과 조우한다. 그것은 다양한 층위로 이행하며 그 위상학적 좌표를 갱신해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미술이 한 번도 장소를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 언제나 땅 위에 세워짐(setting up)을 전제한다는 진실이다.

3.

전시장 초입에 놓인 거대한 스크린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입구가 되어주지 않는다. 강정석은 게임의 구조를 모방한 상징계를 가설하고, 1인칭 시점의 스피드러너를 실행하면서 무한히 질주하고 있다. 우리는 가상의 감각을 체현해왔음에도 왜 이 오차 없는 플레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는가? 여기서 미술의 장소는 가상의 인터페이스와 연동된 경험 자체가 아니라 표면을 투과할 수 없는 잔여물이자 불능감을 야기하는 신체의 어딘가가 된다. 미술의 온전한 영토로서 스크린의 이면을 의심하는 태도는 장서영의 〈이건 결국 반사와 난반사의 문제〉에서 보다 명징하게 드러난다.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혹은 동공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색채와 기묘한 내레이션은 환영의 심층으로 우리를 이끄는 대신, 스마트폰의 액정과 망막이 무한히 반사하는 일련의 광학적 현상으로 전면화된다. 매끈한 표면에 우리의 눈이 비칠 때, 그것은 마치 스크린이 스스로 사물임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온라인도, 오프라인도 아닌 일종의 림보(limbo)의 어딘가에서 이들은 불안하게 배회하고 있다.

4.

화이트 큐브가 점멸할 것이라는 냉담과 그것이 영속하리라는 믿음으로부터 두 개의 시공이 교차한다. 곽이브에게 전시장은 특정한 의미소의 단위이기보다 영원한 항해를 위해 잠시 정박해야 하는 항구에 가까워 보인다. 출입문의 열림과 닫힘을 형상화한 한 쌍의 가변체는 그러므로, 이곳에 당도했다는 선언인 동시에 또 다른 곳으로의 텔레포트(teleport)를 개시하면서 전시장에 놓인 적 없는 오브제가 된다. SNS 플랫폼 위에 설계된 레지던시 프로그램 역시 전시장을 지지하거나 확장시키려는 의지는 없다. 계정을 양도하고 ‘fldjf studio 박보마’를 입주시킨 이 의사-레지던시는 제도적 형식이 아니라 화이트 큐브와 온라인이 공유하는 폐쇄성을 의태 하면서, 대안이 없는 전시장을 건조하게 바라볼 뿐이다. 반면, 홍진훤이 구현한 웹사이트는 양극단의 협곡을 위태롭게 연결하는 교량으로, 온라인에 흩어진 발화들을 링크시켜 다시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낸다. 때때로 종(bell)이 울리면 이 오래된 다리(old bridge)는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시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사유지(思惟地)이자 공공의 아카이브를 상상하는 공유지로서 언제나 전시장 안에서 접속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5.

온라인과 공명하는 다종의 장소들을 에워싸며 전시장 후면에 그려진 이미래와 크리스토퍼 마혼(Christopher Mahon)의 벽화는 하강의 운명을 타고난 둔중한 물질이 운송되는 일련의 과정을 전유한다. 이 작품은 육중한 돌의 개념적 번안과 이를 운반하는 예술가, 종국에 이 모두를 페인팅으로 재현하면서 흡사 디지털의 비물질적 속성을 동경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벽화는 고단한 노동과 육화된 신체를 요구하는, 그 자체로 석조의 강도이며, 동시에 미술이 태어난 태초의 장소와 드물게 포개진다. 그리고 이제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 협곡에 드리운다. 실제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했던 작품들은 침묵으로 가려지고, 예외적으로 밤을 예감했던 김민애의 조각만이 지면에서 떠올라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무한한 온라인의 공간으로부터 기원한 이미지들이 특권적으로 발광하며, 그 가상의 빛으로 실제의 전시장 어딘가를 비추는 흐릿한 풍경. 이제 화이트 큐브는 몰락하는가. 복잡한 행정과 물리적인 제약,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나 더 찬란하고 자유로운, 광활한 가상의 땅으로 이주를 준비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이곳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많은 것을 배우고 또한 만들었으며, 모두를 위한 장소로 이곳을 꿈꾸어오지 않았던가.

6.

저 멀리서 석양이 협곡의 일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이주리의 〈선셋 밸리〉가 만들어낸, 갱신된 데이터가 모니터로 전송되는 일몰의 순간이다. 이것은 가짜 석양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그럼에도 협곡은 지금, 분명히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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