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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언 강 밑에 흐르는 것

글 권태현

디오라마 비방 씨어터,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 1.25~27 |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디오라마 비방 씨어터(송주호 연출),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2019), 연극, 90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사진: 김진호

 

#1-1

세련된 건축에 어울리지 않는 좁은 화장실. 한 명이 겨우 들어가는 면적이라 문을 여닫을 때 조심해야 한다.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나와 티켓을 받는다. 티켓 부스에 공연의 제작자가 나와 있다. 표를 받아 줄을 섰다. 모두 길쭉한 공연 팸플릿을 읽는다. 밑에 연출가 송주호의 제작 노트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제게 이 구절은 무대 공연의 메타포로 읽힙니다.” 그 위쪽에는 붉은색이 덧씌워진 아드리안 반 드 벨트(Adriaen van de Velde, 1636-1672)가 그린 공연과 같은 제목의 회화가 어렴풋이 보인다. 인쇄물의 해상도가 엉망이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간다. 제작자는 위쪽에 앉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며 넌지시 일러줬다.

 

#1-2

공연 시간에 늦었다. 극장 문은 닫혀있고,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한다. 순간, 복도 반대편 끝에서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다. 송주호 연출가의 지난 공연에서도 봤던 외국인이다. 잘되었다 싶어 조심히 따라 들어간다.

 

#2-1

제작자가 알려준 것처럼 약간 위쪽에 좋은 자리를 잡았다. 조명은 전체적으로 밝은 편이고, 무대에는 벌써 누군가 올라 있다. 베토벤이 흘러나온다. 관객들이 한 명씩 들어와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무대 위의 인물은 움직이고 있다. 시작을 선포하지 않았음에도 연극이라는 장치는 서서히 작동하며 무대 위의 움직임을 일상적 몸짓들과 분리시킨다. 걷는 사람과 걷는 것을 연기하는 사람 만큼의 거리. 무대에는 아직 공사 중인 극장의 로비와 티켓 부스가 연출되어 있다. 배우가 벽을 칠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3일짜리 공연의 둘째 날. 다음 공연에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기 위함인지 무대 장치의 벽에 시트를 붙여놓고 그 위를 칠한다. 연극이라는 픽션 속 의미 없는 행위의 반복. 무대에선 벌써 무엇인가 벌어지고 있는데, 관객들이 계속 들어온다. 지각생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찾는데, 또 한 명이 들어온다. 이번에는 바로 무대를 향한다. 그도 관객(을 연기하는 배우)이다. 같은 문으로 들어오는 (객석을 향하는) 관객과 (무대를 향하는) 관객.

 

#2-2

문이 열린 틈을 타 재빨리 들어왔는데, 그 앞 사람은 무대를 향해간다. 사람들이 내가 들어온 문 쪽에 시선을 준다. 고개를 숙이고 아무 자리에 앉는다. 한숨 돌리고 무대에 집중하려 한다. 내가 들어온 문으로 계속 사람들이 들어온다. 주저 없이 무대로 향하는 사람들, 혹은 나와 같이 두리번거리며 객석으로 향하는 사람들.

 

#3

하나의 문은 극장의 문이면서, 동시에 무대 위 극장의 문이다. 그들은 같은 문을 통해 다른 세계에 진입한다. 연극이라는 환영적 체제의 일부인 배우들, 혹은 연극이라는 환영을 승인하기 위한 관객들. 여기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 환영을 만들어내는 배우들도 관객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극장의 관객인 나는 무대 위 극장의 관객들을 보고 있다. 생각해보니 이것은 공연을 예매하기 전에 보았던 시놉시스와 다르다.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무대 위 관객을 연기하는 배우들도 객석의 관객들과 똑같은 팸플릿을 읽고 있다.

 

#4

관객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무대 위 극장 로비도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 말 없는 제스처들이 이어진다. 잘 읽히지 않아 지루해질 무렵. 티켓 부스 안쪽에서 손이 빼꼼 보인다. 붉은 커튼 밖을 더듬는 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 커튼에서 나는 신화 속 파라오시스의 장막을 연상한다. 환영의 극한에는 장막이 있었다. 그것이 걷히고 배우와 함께 마이크가 등장한다. 이전까지는 이 공연에서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말들이 없었다. 무대와 마이크라는 장치에 대해 생각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것, 그리고 감각적인 것의 나눔. 그 기계 장치를 가진 사람만이 들리는 말을 할 수 있다. 마이크를 쥔 티켓 판매원은 안내방송을 한 뒤, 티켓을 팔기 시작한다. 관객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줄을 선다.

 

#5

극장 속 극장의 이름은 ‘디오라마 비방 시어터(diorama vivant theater)’. 이 작업을 연출한 극단의 이름과 같다. 그것은 디오라마(diorama)와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을 섞은 말이다. 타블로 비방, 그러니까 살아있는 그림. 하지만 그림은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 애초에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 안에 잠재된 회화성을, 회화 안에 잠재된 연극성을 일깨운다. 마이크가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또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공연은 구조화된 대사들이 아니라, 쉽게 구조화되지 않는 몸짓들과 시각적인 것들로 구성된다.

 

#6

무대 반대편의 문으로 관객들이 들어가자 소리가 흘러나온다. 여기에서 공연은 극적으로 시각적인 것에서 청각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무대 위의 극장 로비에 고정되어 있다. 사건이 펼쳐지는 곳으로 우리의 시점은 이동하지 못한다. 연극은 시작하는데, 객석의 사람들은 무대 위 티켓 부스 안에서 몰래 과자를 까먹는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한다. 쇼트 전환이 안 된 방송사고처럼. 보이스오버(voice-over)로만 들리는 극 안의 극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은 실소를 자아내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서사가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정체불명의 ‘알레그로기’(연출가는 이것을 알레고리와 알레르기의 합성어라고 밝힌다.)에 사람들이 전염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된다. 주인공 유승은 그것도 모른 채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시골 마을에 머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 전체의 메타포인 ‘언 강’이 갑자기 등장한다. 그는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직접 강 위에 올라선다. 그러다 스케이트 타는 사람의 날에 긁혀 피를 보게 된다. 위험한 얼어붙은 강.

 

#7

연출가의 말처럼 여기 구축된 세계에서 ‘언 강’은 무대의 메타포일 것이다. 무대를 경계로 다른 세계의 이접이 이루어진다. 언 강의 표면을 생각해보자. 흐르던 물이 응고되어 만질 수 있는 표면을 가지게 된 그것. 그러한 메타포는 움직임을 극적인 정지 상태로 응축시키는 연극의 타블로와 연결되기도 한다. 또한 언 강이라는 은유는 그것이 같은 물질의 상태 변환을 통한 비유이기 때문에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는 인상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언 강의 표면이 녹아 버릴지, 깨져 버릴지, 너무 얇진 않을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밑에는 차디찬 물이 흐르고, 그곳에 빠지면 다시 올라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두려운 마음을 안고 그 위에 올라서 즐겁게 미끄러지곤 한다.

 

#8

나름 흥미로운 전개를 가진 공연 속 연극을 귀로 들으면서, 눈은 지루한 무대 위를 보는 상태가 지속된다. 그러다 극 중 관객들이 극장 문을 열고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둘 많아진다. 관객을 연기하는 배우 한 명이 이상하게도 구토 증세를 보인다. 아마 극 중 극의 ‘알레그로기’에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이 캐릭터를 통해 경계가 나름 명확했던 세계들이 교란되기 시작한다. 너무 직관적이긴 하지만, 그 병의 증세가 ‘구토’인 것은 특기할 만하다. 사르트르의 책 속 앙투안 로캉탱도 물수제비를 뜨려다가 갑자기 구역질을 느낀다. 물의 표면을 미끄러지는 그것 말이다.

 

#9

공연은 ‘알레그로기’부터 시작해서 상징이 넘쳐난다. 대부분은 영화적으로 말하면 맥거핀 같은 장치들이다. 하지만, 언 강이라는 비유에서 생각해보면, 상징계 위를 미끄럼타며 유희하는 모습을 유비할 수 있다. 스케이트는 목적 없는 미끄러짐이다. 그리고 시니피앙은 얼음의 표면처럼 미끄럽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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