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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ART

안에서, 안에서부터 움직이기

글 권태현

《현대 커미션: 타냐 브루게라(Hyundai Commission: Tania Bruguera)》 | 2018.10.2~2019.2.24 |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현대 커미션: 타냐 브루게라(Hyundai Commission: Tania Bruguera)》 ©권태현

 

작년 이맘때, 테이트 모던에 아직 수퍼플렉스(Superflex)의 그네가 흔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타냐 브루게라(Tania Bruguera, b.1968)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다음 터바인홀 커미션 선정 소식을 알려왔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포스팅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있었다. “현대의 시스틴 채플 커미션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honored to be doing the modern sixtine chapel commission.)” 별것 아닌 소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흥미롭게 읽혔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 출신의 작가, 그것도 정치적인 작업으로 잘 알려진 타냐 브루게라가 런던의 터바인홀을 바티칸의 시스틴 채플에 비유하다니. 서양 미술사에서 소위 르네상스라 불리는 시절, 교황은 가장 권위 있는 미술 커미셔너였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보티첼리(Botticelli) 같은 최고의 예술가들이 신(의 자리에 앉은 교황)에게 자신의 재능을 봉헌했다. 시스틴이라는 이름 역시 교황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다시 21세기로 돌아와 타냐 브루게라가 비유한 둘을 놓고 보자. ‘현대의 시스틴 채플’ 터바인홀 커미션의 현재 공식적인 이름은 ‘현대 커미션(Hyundai Commission)’이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글로벌 미술 기관의 위상과 자본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도와 미술의 역관계가 더욱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티칸의 성직자들이 미켈란젤로의 누드 프레스코에 속옷을 입히던 시절이 아니다. 오늘날 자본과 제도는 어차피 그 바깥은 없다는 듯, 거의 모든 종류의 비판적 실천들을 너그러이 그 안에 품는다. 초국적 자본이 마케팅에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를 전유하는 현상이 본격화되고 있고, 미술 안에서도 자본의 지원으로 급진적인 작업이 펼쳐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나 동시대 미술 기관들은 대부분 이러한 종류의 분열증을 앓는다. 제도 기관이 제도 비판 이후의 미술사까지 품어야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비물질 작업으로 미술 시장과 컬렉션 자체를 문제 삼는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작업을 기관들이 소장한 것이 그 모습을 잘 보여준다. 검열에 대한 우려나 단순한 제도 비판 논의는 오늘날 제도와 자본에 유효한 토론을 제기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세에서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 정치적 작업은 가능할까? 타냐 브루게라는 과감하게 제도 안에서 움직이며 여러 층위로 그것을 시도한다. 이번 작업에서 그는 먼저 터바인홀의 장소성에 비판적으로 개입한다. 터바인홀은 거대한 기관의 내부이지만, 티켓 없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공공간의 성격을 함께 지닌다. 런던 시민들은 그곳을 놀이터나 공원처럼 이용한다. 2000년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첫 번째 커미션 작업부터 그곳에 쌓아온 시간들을 들춰보면 터바인홀에 구축되어 온 장소성을 파악할 수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가 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날씨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2003), 그리고 카르스텐 횔러(Carsten Höller)의 〈테스트 사이트(Test Site)〉(2006)는 그곳을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공간으로 만들어 온 핵심적인 작업이었다. 바로 전 프로젝트인 수퍼플렉스의 〈하나 둘 셋 스윙!(One Two Three Swing!)〉(2017)도 그렇게 만들어진 성격에 어긋나지 않는다. 한때 ‘관계’라고 이야기되던 새로운 방식의 스펙터클을 대표하는 장소가 바로 터바인홀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적대(antagonism)를 드러내는 작업을 펼쳤을 때, 오히려 더욱 극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의 〈쉽볼렛(Shibboleth)〉(2007)이 그랬고, 무엇보다 타냐 브루게라의 이전 작업 〈타틀린의 속삭임 #5(Tatlin’s Whisper #5)〉(2008)가 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힘을 가졌던 것 역시 그러한 바탕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작업에서도 그는 관계적 작업을 피하고, 적대적인(antagonistic) 혹은 경합적인(agonistic) 공간의 구축을 시도했다. 작업을 살피며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입구에서 가방 검사를 받고 감각을 곤두세워 터바인홀에 들어섰지만,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 어렴풋이 묵직한 사운드가 가슴을 울리고, 바닥이 조금 더 반질반질해 보일 뿐이다. 넓은 홀을 가로질러 입구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그제서야 바닥에 흐릿하게 초상 이미지가 보인다. 그것도 전시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 드러난 것이다. 원래는 이미지가 열 감지 잉크로 바닥에 완전히 감추어져 있었고, 신체를 가져가면 딱 그만큼의 이미지만 살짝 드러났다. 초상 이미지의 주인공은 유세프(Yousef)라는 이름의 런던에 온 시리아 난민인데, 이러한 설치를 통해 관객들은 자신이 딛고 있는 바닥에 난민의 얼굴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시간적 거리를 두고 알게 된다. 이미지가 드러난 상태에서도 형체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거리가 필요하다. 형식적으로는 적대를 드러내면서도 타자의 이미지를 사려 깊은 방식으로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탁월하다. 그러나 난민을 예술 작업의 주제로 끌어들이는 일은 그 자체로 너무도 복잡한 층위를 내포한다. 지난 몇 년간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계에서 난민 문제는 수없이 다뤄져 왔다. 같은 논의가 반복되는 것의 피로감과 더불어 이런 종류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서구 미술계의 새로운 상징자본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도 비판적 견지에서 생각해야 할 지점이다.

타냐 브루게라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 몇 가지 활로를 만든다. 무엇보다 그는 난민의 초상 이미지를 비롯한 작업들을 직접 구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가 조직한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테이트의 이웃(Tate Neighbours)’이라고 이름 붙인 커뮤니티는 테이트 모던과 같은 우편번호를 쓰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손수 작업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조직하고, 테이트 모던이라는 기관이 그 커뮤니티와 협업하도록 추동하는 자리에 위치한다. 동시에 그는 쉽게 사용되는 ‘커뮤니티’라는 개념을 의문에 붙였다. 커뮤니티라고 하면 어떠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게 되는데, 그러한 접근이 오히려 배제의 근거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웃’은 다르다. 그것은 어떠한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아도 오직 물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문제를 말한다. 그리고 지금 런던이라는 메트로폴리스에서 이웃을 사유하는 것은 당연히 이주와 난민이라는 존재에 대한 사유로 나아가며 보다 큰 틀에서 개연성을 얻게 된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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