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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희망과 불안의 도피처

글 김정아

《정지현: 다목적 헨리》 | 3.9~5.5 | 아뜰리에 에르메스

 

《다목적 헨리》 전시 전경, 사진: 남기용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주름 하나없이 깨끗한 매장 한쪽에는 회전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간다 한들 바로 전시장이 나타나는 건 아니다. 레스토랑 손님들과 불편하게 눈을 마주치고 갑자기 어두운 복도를 지나야 한다. 여기서부터 스토리텔링이 시작된다. 전시장에 들어서기까지 여느 미술관과는 다른 느낌, 화이트 큐브인데 작품 하나 없이 텅 비어도 무색이 아닌 공간. 정지현 작가는 전시를 준비하며 이 공간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레스토랑 음악도 들리는 마당에 여기서 소리를 내거나 빛을 제한해 어떤 강제적 환경을 만들지 않기로한 것이다. 오히려 매장 안 공간, 레스토랑 옆이라는 특징을 다 받아들여 유연하게 작업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장 입구에 마치 웰컴보드처럼 서 있는 입간판들(〈입간판 M〉, 〈입간판 W〉)을 맞닥뜨린 관객은 ‘이게 뭐지?’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전시장이 아니라 상품이 진열된 것 같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관객의 위치를 함께 생각하며 연극적인 관람의 장면을 연출해 온 정지현은 이번 개인전에서도 관객을 위한 미로를 만들어 놓은 듯하다. 그는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공간 안으로 섬세하게 밀어 넣는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하고, 느닷없으면서도 조용하다. 우연적이고 불가해한 풍경이 지금 당신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지난 10여 년 간의 정지현의 작업은 ‘말’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가 점차 확장/변이되어 온 과정이다. 개인을 무감각하게 하는 날마다 속출하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말들이 그의 작업의 주제라면, 생산과 소비, 폐기의 빠른 순환을 거치는 자본주의 세계의 어느 틈에서 버려지는 도시의 부산물과 폐기물들은 정지현의 작업 재료가 된다. 다시 말해 정지현은 이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의미를 이루기도 전에 증발하거나 흩어지는 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제 생을 다 살기도 전에 버려지는 오브제들에 투영해, 길에서 주운 오브제들을 다른 조합으로 엮어냄으로써 스스로를 무력함으로부터 해방시켜왔다. 그에게 있어 소화하지 못한 말들과 버려진 물건들은 서로에게 몸을 빌려주면서 연민의 대구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반복적인 생활 패턴 속에서 힘을 잃고 버려지는 것들, 멀어지는 것들, 그렇기에 현실에 거리를 둔 공상의 자양분이 되는 파편들에게 새로운 자리를 찾아주며 또 다른 가치를 부여했다. 정지현은 그러한 출처가 모호한 파편들을 수집하고 해체하고 이것을 다시 재조합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각각의 사물들이 가진 원본의 질서를 교란하고 이것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변화시킨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인 《다목적 헨리(Multipurpose Henry)》에서 ‘헨리’는 영국의 대표적인 현대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에서 차용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다양한 맥락으로 등장해 도심 곳곳에서 발견되는 무어 풍의 조각에 대한 작가의 감정으로부터 유래한 제목이다. 애초의 의도와 목적을 상실한 채 도시에 방치되고 유기되는 수많은 공공 조형물―다양한 맥락을 지닌 헨리 무어 풍의 조각들―로부터 출발한 작가의 의심과 질문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드러낸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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