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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슬픈 수치심의 공명

글 허호정

《리킷:슬픈 미소의 울림》 | 3.1~4.28 | 아트선재센터

 

리킷, 〈White〉, PVC, 프로젝션 이미지, 가변크기, 2019,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감정의 연대를 기대해보자. 감정은 때로 강력한 전염성을 가지고, 그중에서도 어떤 감정은 그 자체로 너와 나, 그들을 엮어낸다. 마침, 리킷(Lee Kit)의 작품이 펼치는 ‘슬픔’은 전달되고, 공명한다. 그런데 이 전시가 유독 슬픈 것은, 슬픔의 분위기를 내는 사물들―하얗게 펄럭이는 커튼, 움찔대는 침대 시트, 그와 비슷하게 일렁이는 빛과 소리, 가냘프게 흔들리는 몸, 나뭇가지와 꽃―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들에는 공통적으로 ‘죄책감(guilty feeling, guilt, guiltiness)’의 서사가 등장한다. 화자는 사고를 당한 이의 “죽음” 혹은 몇 주 동안 이어진 “파업”에 관해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낀다(〈한 남자가 말했다〉). 여기서 화자가 죄책감을 느끼는 까닭은, 그가 실은 앞서 언급한 일들에 관해 곰곰이 생각했으며, 또 자기에게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는 적어도 그런 영향 관계를 생각해야 마땅하다는 도덕적 잣대를 스스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죄책감은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그것은 ‘죄’를 설정하는 외부의 법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체화한 내면의 격률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안전한 감정이다.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안팎에서 어떤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 있어 되려 기뻤다.”(전시 리플렛)는 문장에는 거짓이 없다.

그런데 왜 리킷은 자꾸 죄책감을 말하는 것일까? 희미한 빛과 영상들, 서로를 의식하고 방해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는 그 죄책감이 힘을 잃는 듯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저 텅 빈 상자들은? 거의 무용하게, 이미지들을 가로막고 있는 이 체적은 무엇을 의미할까?

전시장 곳곳에 하얗고 투명한 상자들이 쌓여 있다. 그는 상자 위에 프로젝터를 올려놓고 그것을 지지대로 쓰거나, 상자 자체를 영상이 투과되는 한 층의 렌즈로 삼곤 했다. 가령, 〈영화의 한 장면〉을 설치하면서 작가는 프로젝터 렌즈 바로 앞에 상자를 두었다. 영상은 하얗고 투명한 플라스틱 면을 투과하고, 다시 한번 맞은편에 부딪히면서 두 번의 필터링(filtering)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결과적인 장면은 상당히 뿌옇게 되었고, 살과 얼굴, 누군가의 뒷모습, 그리고 미세한 떨림을 클로즈업하는 〈영화의 한 장면〉은 더욱 모호해졌다. 이것은 한 쌍의 커플이 애무를 나누는 장면을 좀 더 낭만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위와 같은 설치 방식이 단순히 ‘한 장면’을 좀 다르게 보여준다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환기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정확히 볼 수 없는 정황, 무엇을 본다는 행위 자체를 둘러싼 시선의 교차가 다차원적으로 작동하는 정황을 환기한다. 그리고 그 자체로 이미지가 된 미디어-미디엄, 실루엣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저기에 사랑을 나누는 누군가가 있고, (혹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고―이 두 경우 모두 ‘보인다(be seen)’는 의미에서 대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내가 있고, 그 사이에/옆에/뒤에 이를 매개하는 텅 빈―그러나 하얗고 뿌옇게 가로막는―체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은 벽에 붙은 나무 패널들에서도 드러난다. 흰 벽에 영사되는 비디오 이미지는 그보다 크거나 작게 붙은 패널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패널들은 이미지가 출력되는 바탕이 되기엔 강한 물성을 드러내고, 영사되는 이미지 역시 그 바탕을 정확히 조준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엔 패널이 영상의 옆에 붙어서 다른 의미를 지시하기도 한다. (2층 안쪽에 설치된 〈무제〉에서 침대와 탁상용 스탠드가 보이는 장면은 그 옆에 붙은―영사된 이미지보다 훨씬 작은, 색칠된―합판에 의해 이상한 두께를 얻는다. 이 나무 패널은 침대의 일부분으로 보이거나, 그 위에 놓인 무엇으로 보인다. 그도 아니라면, 이 하얀 면, 벽, 나무 패널은 무엇으로 보이는가?)

이러한 설치 방식은 3층 전시장에서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가벽의 한 귀퉁이에 〈A4〉를 걸고, 전시장의 다른 벽(혹은 창)에 종이, 천, 아크릴판, 비닐 등을 덧댔다. 벽에 완전히 들러붙지 않아 약간의 뜬 공간을 마련하는 이 나약한 평면들은, 이미지가 결코 평면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전시장 중앙 바닥에 위치한 세 대의 프로젝터에서 출력되는 이미지는, 그 앞으로 움직이는 관객의 그림자와 벽에 붙은 다른 것들에 의해 계속 흐려지고 서로 엉기며 비껴간다.

전시장의 작업 모두에서 미디어는 그 안에 든 내용물이나 뚜렷한 원본성을 갖는 작품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들 서로를 방해하는 옅은 장막으로써만 작동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의 겹침, 방해, 정확히 볼 수 없는 정황은 관객이 전시장에 들어오면서 보고자 했던(supposed to see) 무엇의 “옆에(beside)”서 혹은 “뒤에(behind)”서 확인된다.

이쯤에서 다시 죄책감의 서사를 떠올려보자. 〈조약돌〉에서 죄책감은 한 줌의 조약돌과 같은 행복의 옆자리에, 그러니까 “혼자, 행복한(alone and happy)” 사람의 “옆에 앉는(with guiltiness sitting beside it)”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꽃에 대해〉에서 죄책감은, “말을 할 때(talking made her feel guilty)”, 말을 하면서 “허기(and hungry)”를 느낄 때 동반하는 것이라고 서술된다. 왜 그것은 말과 함께 나타나며, 행복의 ‘옆에’ 앉는가?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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