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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ON

사월, 세월, 그리고 ‘보고 싶다’는 것에 관하여

글 최종철

1. ‘가만히 있으라’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다. 수학여행을 가던 수백 명의 아이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러나 ‘수백’이라는 숫자가 지시하는 물리적 손실의 크기는 이후 살아남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심리적 상처, 그 거대한 고통의 크기를 다 포괄하지 못할 것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우리는 삼백여 개의 세상이 송두리째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재난 앞에서 정부는 무능했으며, 구조대는 머뭇거렸고, 선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이 승객을 버리고 탈출하는 그 소름끼치는 패악의 순간에 아이들은 닥쳐올 죽음의 공포와 외롭게 싸워야 했다. 선실에 차오르는 바닷물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따랐던 무구한 아이들이었다. 땅 위의 어른들은 끊임없이 상황을 오판했고 안일히 대처했다. 배 안에 남은 사람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만 했으나,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선박 회사는 온갖 부정과 비리와 의혹 속에서 세월호의 위태로운 항해를 지속해오고 있었다.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치 지난 반세기 동안의 적폐를 숨기고 나아가는 대한민국처럼, 세월호는 그날 새벽의 위험한 항해를 또 다시 감행했고 황망히 가라앉음으로서 국가의 재난적 현실을 상징하고 말았다.

 

2. ‘살아서 보자’

배가 가라앉는 순간 아이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의연했다. 가만히 있는 것이 모두의 안전을 위한 길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믿고 기울어가는 배 안에서 서로를 위로해 가며 기다렸다. 절망적인 순간에 이르러서조차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안위보다 남겨질 가족들을 걱정했다. 물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누군가는 부모 형제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냈고, 누군가는 슬퍼할 친구들을 위로했으며, 못다한 사과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휴대전화 메시지와 사진들을 통해 죽은 아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발견한다. “살아서 보자.” 단원고 2학년 박예슬 양은 친구들이 가득 모로 누워있는 세월호의 복도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휴대전화의 영상 녹화 장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단지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기울어진 배 안에 갇혀 있는 ‘나를 보라’는 것, 그리고 나중에 구조된다면 잠시 위협받은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서 혹은 구조된 삶에 대한 확인으로서 서로를 ‘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존재의 물리적 소멸에 맞서 보고 보이는 ‘이미지로서 스스로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의 위안과 확신’을 믿으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사진들과 메시지들은 사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한 존재가 자신을 위협하는 폭력과 공포에 의연히 대항한 존재론적 기록이며, 그런 한에서 각자의 소소한 사연을 넘어서는 심리적·역사적·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Images in spite of all)』이라는 책에서 소멸에 대항하는 이미지의 필사적인 투쟁에 대해 고찰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유출된 네 장의 사진들을 분석하는 이 책은 유태인 말살(The Final Solution)의 동기가 단지 많은 유태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완전히 말살함으로써 유태인이라는 ‘이미지’를 없애려는 시도, 그리하여 이 이미지의 부재 속에서 한 인종에 대한 상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였다고 본다. ‘가만히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유대인 포로들은 그러나 이미지를 없애려는 나치의 시도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들은, 마치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과 같이, 속박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몸이었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증언으로서 사진과 편지, 그림들을 남겼던 것이다. 따라서, 위베르만은 이 유출된 사진들과 종전 후 발굴된 수용소의 담장 밑에 묻힌 수많은 사진들, 편지들, 그림들이 이미지의 말살에 저항하려는 시도,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투쟁,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재현의 위대한 생존이라고 주장한다. 종전 후, 유럽의 지식인들이 앞 다투어 홀로코스트의 재현불가능성을 논했지만, 정작 재난의 희생자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재현하고자 했으며, 이 재현의 시각적 증명이 가져올 구원의 손길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내의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세월호를 재현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불가능성을 토로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과 망설임이 문화에 팽배해지는 동안,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에서 마땅히 그리고 투명하게 인지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 아닌, 어떤 불가해한 신화적 사태로 변모하고 말았다. 재현의 부재가 초래하는 것은 바로 재난의 신화화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윤리적 염려들에도 불구하고 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3. ‘잊지 않겠습니다’

사고 후 가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침몰 현장 인근의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배가 이미 대부분 물에 잠겨 어찌 손써볼 여지도 없었지만,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배가 안전하지 못했다면 바다로 뛰어들었으리라고,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저 선미 어딘가에 모여있으리라고, 그도 아니면, 잠긴 배 안의 조그만 에어포켓 안에서라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 가족들은 믿었다. 그러니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해경뿐만 아니라 해군도, 민간 어선도, 훈련 중인 미군 함정도, 아직 검증되지 않은 ‘다이빙 벨’도, 할 수만 있다면 바닷물을 모조리 빼서라도 아이들을 구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그토록 간절했을까? 이미 가라앉은 배 앞에서 그들은 무엇을 그렇게 갈구하고 있었을까? 세월호의 황망한 침몰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이 울부짖는 절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간의 무도한 비난처럼 이미 죽은 아이들을 살려내라는 억지가 아니다. 그 절규의 본질은 아이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는 것, 더 이상 볼 수 없게 됨으로써 야기된 그 감각의 고통스러운 마비와 실존적 확신의 붕괴를 견딜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망각의 참을 수 없는 살의에 온 힘을 다해 대항하는 것이다. 그 어떤 정치도, 이념도, 금전적 보상도 오직 보기에 의해서만 해결 가능한 이 실존의 위기와 고통을 해소할 수 없다. 가족들이 그저 집 안에서 눈물이나 훔치며 있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러한 체념과 포기가 아이들이 죽는 순간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신들의 이미지를, 그 실존적 흔적을 서서히 지울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이자 희생자 유예은 양의 아버지 유경근 씨는 세월호 사건 한 달 뒤에 진행된 추모 미사에서 ‘무수한 위로의 말들이 전혀 와닿지 않음’을 토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한달 뒤에도 잊지 않겠습니다.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잊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잊히고 우리가 잊히는 것입니다.” 말들은 집요하게 결코이해될 수 없는 아이들의 죽음과 유가족의 슬픔을 설명하고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그 죽음과 슬픔은 언어적인 사태가 아니라 감각적인 사태, 즉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감각의 절연에서 오는 것이다. 말은 죽음을 이해하라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자고, 그리고 이제 그만 잊으라고 종용한다. 그 죽음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을까? 슬픔과 애도에 기한이 있는 것일까? 세월호를 잊을 수 있을까? 애도와 망각의 언술들은 단지 산자의 의식일 뿐, 죽은 아이들은 말이 없고 단지 이미지로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뿐이다. 세월호 이후 ‘보고 싶다’라는 고백이,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 좌절된 실존 투쟁의 개시를 독려하는 내적 요구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말을 멈추고 아이들을 봐야만 한다. 어른들이 ‘보려 하지 않고 말만 하는 와중에 죽어간’ 그 아이들 말이다.

 

4. ‘눈이 멀어 있었다’

아이들의 실존 흔적인 이미지는 제 시간에 전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보여지고 이해되지 못한 채 어떤 금기의 도상으로 남았다. 재현의 금기는 그러나 그것을 용인했던 이들에게 윤리적 확신보다 더 큰 불신과 자괴감을 주었는데, 이는 세월호 참사가 결코 금기될 수 없는 ‘이미지 재난’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그 이미지의 고통과 공포는 세월호가 침몰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돌이켜보면 이미지는 항상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바로 보지 못했을 뿐이다. 미디어는 침몰하는 세월호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아이들은 구조를 바라는 문자와 영상을 계속 보내왔지만, 마치 눈이 멀어버린 듯 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고 후 12시간이 넘도록 아무런 정부 주도의 구조 활동이 없었는데도 정부와 일부 언론이 수백 척의 비행기와 배, 인력을 동원하여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명백한 거짓말을 일삼아도 그저 수긍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소름끼치는 감각과 관심의 부재 속에서, 세월호는 자신의 늙고 비대해진 몸 속에 아이들의 채 피워보지 못한 세상을 담고 맹골수도의 소용돌이치는 바다 속으로 잠겨들었다. 그리고 마치 결코 끝나지 않을 악몽처럼, 수장되는 세월호 선체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미디어를 통해 보여졌다. 모두가 빤히 보고 있는 와중에 그렇게 황망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무수히 반복된 그 이미지의 공포를, 그 절규를, 그 고통을 그때는 왜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모로 누운 채 바튼 숨을 몰아쉬는 세월호의 구조 신호를, 아니 그보다 앞서, 무너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불탄 대구의 지하철과 씨랜드 리조트, 사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진 산하에 진동하는 썩은 내, 침몰한 천안함과 연평해전의 사상자들이 처절히 증명하고자 한 불안한 국가의 구조와 적폐를 읽을 수 없었을까? 세월호 침몰은 어떤 개별적 인과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단순한 해양사고, 혹은 ‘교통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앞선 모든 국가적 재난들처럼 한국 근대사의 근본적인 적폐와 부조리들이 역사적 징후로서 매 순간 우리에 의해 고통스럽게 자각되는 어떤 예기된 트라우마다. 그리하여 세월호가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우리가 본 것은 트라우마로서 귀환한 역사의 실재, 그 소름끼치고 고통스러운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혐오스럽고 수긍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5. ‘본다는 것’

그러니, 우리 중 누군가가 이처럼 역사를 가로질러 우리 자신의 깊고 아픈 질환을 드러내고 만 세월호와 아이들의 역사적 죽음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오랜 시간을 에둘러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다가온 역사적 진실을 다시 망각의 바다 속으로 밀어내고, 외면하며, 그렇게 허망하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한 아픈 역사의 종결이 아니라 반복되는 역사적 문제에 대한 보류이자 방기이며, 세월호의 상처는 그렇게 방치된 채 결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우리는 가라앉은 세월호를, 죽은 아이들을, 가족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그리고 이 모든 고통과 상처의 원인들을 지켜봐야 한다. 물론 이러한 보기는 죽은 자의 존엄을 훼손하고, 가족들의 고통을 연장하는 잔인하고 무례하며 부도덕한 시각적 욕망에 종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기를 멈출 수 없는데, 이는 바로 우리가 언제나 눈에 의해 매개되는 존재, 즉 볼 수 없었다면 결코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행동할 수도 없는(심지어 눈이 먼 이들 조차도 시각적 이미지로 상상하고 소통하는) 그런 ‘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에 따르면, 본다는 것은 “한 대상이 자신 안에 감추고 또 은연중에 드러내는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대상 안에 거주하는 것이며, 이 거주를 통해 그 대상에 현시된 모든 관계된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보기에 의해 파악된 이 관계들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 사이의 반목과 갈등, 불신과 위협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보기 자체는 직접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세월호 사건 보도에서와 같이 잘못된 보기, 편향된 보기 혹은 무관심한 보기로 끝남으로서 보기 자체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훼손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보기의 현상학에서 주장되듯, 본다는 것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적/상보적 지각 현상이며, 보기에 대한 가치 판단은 시각적 의지(지향)의 윤리적, 정치적, 감각적(미학적) 인과를 고려하는 상호성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표현을 빌자면, “내가 그러한 것들을 보는 한에도, 그것들이 나의 응시를 향해 열려있을 것이며, 내가 잠재적으로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동안, 나는 이미 다양한 측면에서 내 현시각의 중심 대상을 지각하게 되는 바, 모든 대상은 다른 모든 것들의 거울인 셈이다.” 거울처럼 내가 보는 것이 나를 비춘다. 이 거울은 “나의 살을 저 밖의 세상으로 이끌고, 동시에 내 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만드는 심리적 힘을 내가 보는 저 타인의 몸들 속에 투여하는” 보기를 매개하는 도구인 바,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마치 우리를 이루는 물질들이 그들 속으로 투과되어 들어가는 것처럼, 타인의 몸을 받아들인다.”9 따라서 보기는 수동적이고 무의식(지)적인 관조가 아니라, “하나의 대상을 자신의 몸속으로 통과”시킴으로써 그 대상과 감각적 교류를 나누는 일종의 “시각 행위/행동(vision in act)”이다. 이 행동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눈을 통해 나와 대상들 사이를 헤매고”, “정신의 날카로운 투시력을 그 대상들에게 조율하며”, 그 대상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내재적 등가성(internal equivalent)을 갖도록” 이끈다. 본다는 것은 이처럼 보이는 대상을 거쳐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for us and in-itself) 가시적인 것들의 여정으로서, 우리는 봄을 통해 우리 내부로부터 발현하는 타인의 살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경험한다. 이 순간, 우리는 우리 “내부로부터” 몰려오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 속에 “살게 되고”, 그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데, 이를 통해 재난의 세계는 “우리의 눈앞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로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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