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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불멸사랑이 망각한 것과 기억해낸 것

글 권태현

《불멸사랑》 | 2.22~5.12 | 일민미술관

 

서용선, 〈KW 04-0202〉, 종이에 아크릴, 연필, 파스텔, 2004, 사진: 서스테인웍스

 

전시가 시작하기도 전에 ‘불멸사랑’이라는 플래카드가 먼저 내걸렸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일민미술관의 위치와 정치적 상황이 만나며 《엉망》 전시의 플래카드가 만들었던 미학적 충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기억을 더듬기 위해 인스타그램의 타임라인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만의 기억은 아닐 것이라는 예감으로 ‘#엉망’ 해시태그(hashtag)를 타고 들어가니 수백 개의 같은 이미지들이 쏟아진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표상하는 비슷한 이미지들. 이제는 그것이 기억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불멸사랑》은 이런 조건 속에서 기억과 역사를, 나아가 불멸을 다시 문제 삼으며 펼쳐진다.

《불멸사랑》은 제목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부제로 붙어야 더 적절할 것 같은 전시의 영문 제목은 ‘Immortality in the Cloud(클라우드 속의 불멸)’로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서의 불멸성이라는 주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내세운다. 우리는 이미 디지털과 웹을 불멸한 것과 연결하여 생각하고 있다. 하드 드라이브에 보관된 데이터는 물리적으로 파괴될 수 있기에 불안하지만, 클라우드에 올려놓은 데이터는 안전하고 영속적으로 보관될 것으로 믿는다. 클라우드 역시 물리적 서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TV 시리즈 〈블랙 미러〉의 ‘샌주니페로(San Junipero)’ 에피소드에서는 인간이 서버로 만든 인공 천국이 등장하기도 한다.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지금 여기가 만물을 0과 1로 바꾸어 저 구름 너머 영원한 곳으로 올려보낼 수 있는 세계이다. 불멸, 사랑, 그리고 제의적인 것들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는 요즘 무당이나 점성술사들이 인터넷 라이브 방송을 하는 모습에서 어떠한 계기를 감각한다.

전시도 서문을 통해 “인간의 존재는 사후에도 데이터로 영생이 가능”해졌다는 점을 짚으며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기억과 역사의 문제로 확장한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은 현재나 미래의 시간 속에 항상 먼 과거의 시간이 잠재되어 있는 순환적 시간관을 갖게”하고, 또한 동시대적 미디어들을 통해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 쓰기가 가능”해졌다고 쓰는 기획자는 동시대적 미디어 조건들을 선형적이고 중심이 있는 역사 서술을 재구성할 가능성으로 본다. 이 글은 전시 기획이 딛고 있는 이런 전제들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출발한다. 미디어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들 속에서 망각되는 것들이 있다.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서 파생되는 가능성을 긍정하기에 앞서 그 미디어 환경 자체가 어떻게 매개되어 있는지 살펴야 하고, 한편으로는 전시에서 서사와 역사의 반대편에 놓고 있는 에피소드와 기억, 경험과 같은 것들의 변화된 위상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작업들을 차례로 살피며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하니 벌써부터 막힌다. 기획에서 제시하는 개념들과 전시된 작업들이 어떻게 엮이는지 명료하게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전시가 설정하는 탐구 지점과 전시장에 펼쳐진 작업들이 괴리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속단하여 전시를 비판적으로 진단할 수는 없다.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고, 무엇보다 그 괴리가 미학적으로 작동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부터 차근히 살펴보자. 전시의 흐름을 읽어낼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의 맥락 속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멸사랑’이라는 전시에 ‘3·1절 100주년’ 심포지엄과 ‘진실과 탈-진실’ 심포지엄이 모두 연계되어 있는 방대함은 일단 차치하기로 하고) 기획자는 파비앙 베르쉐르(Fabien Verschaere)가 만들어 배포하는 신문부터 서용선이 개입한 신문박물관의 전시까지 “가느다란 실”이 이어진다고 말하지만, 작업들은 꿰어져 있기보다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가치판단은 미뤄두고, 일단 이러한 양상은 기획 내부에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 전시 자체가 하나의 결말로 내달리는 서사적 구조를 비판하는 에피소드로서의 재구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제시된 작업들도 일종의 내용과 형식이 연동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각 작업들은 서사의 한 부분이 아니라 개별적인 에피소드이기에 전체에 나름의 흐름을 부여하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돌아간다. 기획이 제시하는 것에서 살짝 벗어나 “밟아도 될까”라는 질문으로 작업들을 엮어낸 전시 비평에서 이런 구성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논의를 더 심화시키려면, 과연 파편적인 기억과 경험이 선형적이고 거대한 서사에 균열을 낸다는 논지가 아직도 힘을 가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한편에서는 오히려 역사와 서사가 파편화된 기억과 경험들로 물화되면서 정치적으로 매개된 것들이 망각되는 경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기획자의 글에 언급되는 ‘뉴 레트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과연 역사를 비판하는 변증법적인 힘으로 움직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음악에서의 새로운 레트로, 특히 ‘베이퍼 웨이브(Vaporwave)’ 등의 서브컬처 경향들이 만들어내는 리믹스들은 약간의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뉴 레트로’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논리에 이미 전유되었다. 이런 정세에서는 에피소드의 방식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막연한 진단보다 오히려 각각의 에피소드가 결코 역사의 바깥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것을 비판적인 계기를 통해 기억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기획자는 “자본의 괴물 같은 포획력은 인간의 불멸을 향한 욕망마저 지배한다.”는 점을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와 그의 연구들을 살펴보았을 때 소위 ‘포스트 미디어(post media)’라 불리는 조건의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진단이 큰 전제로 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을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당연히 “자본의 괴물 같은 포획력”은 미디어 환경마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매개하는 미디어가 어떻게 매개되어 있는지 또한 살펴야 여러 층위에서 포스트 미디어의 양가성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해내고, 결론적으로 이 전시가 던지는 중요한 불씨를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제대로 타오르게 할 수 있다. ‘클라우드 속의 불멸’이라는 주제가 지금 한국의 정세와 만나는 곳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실 ‘디지털 장의사’와 같은 현상들이다. 이는 최근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리벤지 포르노’ 범죄들과도 연동된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이미지가 웹에 한 번 올려지면 불멸할 것이라는 불안에 고통을 호소한다. 바로 지금 여기가 포스트 미디어의 디스토피아이다. 이런 판국에서 동시대 미디어 환경의 불멸이라는 것은 ‘잊혀질 권리’라는 대항 담론을 통해 성찰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기억해내야 한다. 조은지 작가가 인도네시아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증언을 기억과 기록의 (불)가능성 속에서 이미지화하는 특정한 방식은 그렇기에 오히려 미학적 균열을 만드는 것이다.

논의를 더 밀어붙이면 여기에서 “이미지에 대한 더욱 강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당장에 눈에 띄는 문제들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미디어들이 이미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플랫폼화된 글로벌 자본들은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흘리는 모든 데이터들을 주워 모아 영원불멸한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대문자 무엇의 자리를 점한다. 새로운 미디어 조건은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시키고 가동할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의미의 인프라 미디어-상품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상품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욕망과 소비를 창출하는 토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전체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앞당긴다는 긍정적인 전망 속에서 망각되는 것들, 그러니까 그 실천들마저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 자본에 매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야 한다. 웹을 통해 구축된 지구촌이라는 관념은 착취에도 그 경계를 없애버렸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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