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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데이터 백업을 생활화합시다

글 한혜수

《네오서울: 타임아웃》 | 3.12~4.13 | d/p

 

《네오서울: 타임아웃》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d/p

태초에 신이 거주하는 원형세계(原形世界)가 있었다. 원형세계는 본질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변주한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변주한 것을 모두 포함하는 집합이다. 첫 번째 우주는 이 원형세계 안에 만들어졌지만, 불순물이 많아 금세 붕괴해 버렸다. 이에 신은 원형세계의 본질을 추상화한 두 번째 우주를 창조했다. 하지만 두 번째 우주도 데이터 과부하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멈추고 말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미메시스한 이 장난 같은 언술들은 김용관의 비트맵 애니메이션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는 《네오서울: 타임아웃》의 설정값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다. 전시는 “우주의 용량이 초과되어 우주가 멈추었다”는 가정을 공유한다. 이 설정은 “용량이 꽉 찬 서울을 그대로 복제하여 백업시킨 뒤 이를 관찰한다”로 심화되며 작품들을 내용적으로 엮어낸다. 영화 〈매트릭스〉 속 1999년에서 시간이 멈춘 가상도시의 질감을 하고 있는 걸까. 어쨌거나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되어버린 곳, 폐허가 된 이 도시는 ‘네오서울’이라 불린다.

“구체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에는 무한수의 구체적인 것이 존재한답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 내의 알레고리에 구체적인 디테일을 기입해 넣는다. 최재훈의 〈fragments of 〈Walking on chaos to mandala〉는 이 멈춰버린 시공에서 유일하게 시간이 흐르는 것 같은 한 소년의 이미지를 만화의 프레임 컷으로 구성했다(작가 노트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청년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소년으로 보였다).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이카리 신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은 (TV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 초기의) 무기력한 캐릭터를 극단화한 것처럼 표정이 없다. 분노하다가, 혹은 울다가 그대로 멈춘 사람들 사이를 소년은 때때로 응시하며 걷는데, 결국 광활한 우주공간 속으로 뛰어들어 소멸한다. 만화 프레임 컷들은 곧 하나의 그림이 되어, 만다라 개념과 접붙었다(〈Walking on chaos to mandala〉). 만다라의 의미를 좇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소년은 무(無)가 된 걸까? 혹은 그 역시 데이터의 집합으로 흡수되기로 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이 소년은 처음부터 데이터였다. 이카리 신지로부터 파생되는 무기력하고 어딘가 초탈한 듯한, 아무렇게나 머리를 기른 소년. 이러한 캐릭터 유형은 서브컬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이미 그 시뮬라크르들이 양산된 상태기도 하다.

최재훈의 그림 속 화내는 사람들의 표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홍민의 〈정의를 위하여〉와 〈엄연히 다르다〉 연작의 형상이 심층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넷(net)상에서 떠도는 혐오의 말, 서로를 편 가르고 집단 속에 기거하며 상대방을 격분시키는 말들에 신체성을 부여한다. 작가노트에 따르면 이는 “육체를 획득한 텍스트”로, 개체들의 머리카락은 서로 마구 뒤엉켜 있고, 눈깔이 빠져 있거나, 울고 있거나 절규하고 있다. 서로를 뜯어먹었는지 파편화된 신체 조각이 내동댕이쳐져 있거나 머리만 돌아다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태가 모노톤 컬러에 아니메(anime) 그림체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 속에서는 일말의 구원의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다.

디테일을 추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의 작업이 마주치는 지점도 있다. 김시훈의 〈Temp=E:₩Temp〉에는 폐건물 안에 토해놓은 듯 쌓여 있는 반추상의 더미가 있다. 이는 컴퓨터 시스템 디렉토리에 있는 ‘Temp’ 폴더의 속성을 시각화한 것으로, 그 안에는 시스템 정보의 부산물들이 임시파일로 저장되고 자동으로 삭제되기를 반복한다. 김시훈은 이 임시적인 것들이 쌓이고, 지워지고, 또 쌓이는 과정을 “항상적 임시”로 규정하는데, 그는 한국이라는 폴더가 있다면 이 Temp 폴더와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다른 디렉토리로부터 수입한 것들로 채워진, 내재가 아닌 외재로서의 임시 저장물의 사회다. 다시 김용관으로 돌아가 보자. “신이 제공한 우주의 아카이브는 (…) 예를 들어, 조선의 시공간, 일제 강점기의 시공간, 산업화의 시공간, 민주화의 시공간. 혼재된 모더니티의 시공간이 하나의 데이터로 제공되었어요. 데이터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어요.” 이는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의 말미에 나오는 내레이션으로, 잡탕 같은 한국적 모더니티를 은유한 것일 테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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