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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끝은 시작으로

글 유혜인

《정연두: 지금, 여기》 | 3.14~5.11 | 페리지갤러리

《지금, 여기》 전시 전경

작년 가을 전시로 선보였던 도쿄도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의 위성 프로젝트 《MOT Satellite》는 미술관의 리노베이션 기간 동안 미술관 인근 특정 지역을 선정해 작가들에게 작업을 의뢰하는 지역 기반 미술 프로젝트였다. 홍콩에서 선보였던 정연두 작가의 〈높은 굽을 신은 소녀〉(2018)를 기억하고 있던 미술관의 큐레이터는 2018년 프로젝트인 《서사가 되기 위하여(To Become a Narrative)》에 정연두 작가를 초청했다. 이를 계기로 제작된 정연두 작가의 〈고전과 신작(Classic and New)〉은 일본 도쿄의 ‘키요스미 시라카와’ 지역 주민들과의 협업으로 완성되었으며, 이 영상 작업에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이야기들을 선별된 매체와 감각적 장치를 활용해 예술로 복원해내는 작가의 일관된 관심사가 드러났다.

프로젝트의 중심이자 작품의 배경인 키요스미 시라카와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도쿄의 가장 핫한 카페 거리’, ‘도쿄 맛집 투어’ 등의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현재는 관광, 소비, 여가의 중심지가 된 지역이지만, 같은 장소에 새겨진 과거 전쟁의 기억과 죽음의 이미지는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한 노인의 증언에서 생생히 되살아난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군의 ‘도쿄 대공습’으로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가는 현장에서 “아버지의 현명한 판단력” 덕분에 두꺼운 철문이 달린 구청 안으로 대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노인의 회상을 듣는 데서 작가의 작업은 시작된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피식민 역사를 지닌 한국 출신의 작가가 일본의 역사를,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다룬다는 것은 최소한 내적 긴장을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작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촬영된 이 노인의 인터뷰 장면은 전체 서사를 이루는 세 구성요소 중 한 축이 된다. 차분한 어조로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노인의 이야기 속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나 분노와 같은 극렬한 감정보다는 전쟁통에도 틈만 나면 친구들과 노는 데 여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이 또렷이 담겨있다.

영상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한 축은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미술 시간,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즐거웠던 기억’ 등을 주제로 그린 그림을 발표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모습이 노인의 회상과 교차되거나 병치되며 등장한다. 딱히 가지고 놀 것이 없었던 옛 시절, 곤충이나 개구리,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길 좋아했다는 노인의 회상 끝에는 사슴벌레를 그린 스케치북을 든 초등학생의 발표가 이어지고,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았다는 노인의 이야기는 늙은 아버지의 얼굴을 그린 아이의 스케치북 속 그림과 연결된다. 노인과 아이들, 이 두 주인공들과 동시에 작품을 전개하는 마지막 축은 이들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라쿠고(落語)’ 명인의 공연이다. 오늘날의 스탠딩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라쿠고는 일본의 에도 시대에 탄생한 대중예술로, 전통의상을 입은 공연자가 단출한 무대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 풍자와 언어유희를 섞은 화술로 관객들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세 부류의 화자를 담아낸 각 스크린은 작가의 편집에 의해 또는 관객의 주목과 연상에 의해 절묘하게 연결된다. 한 해의 시작인 ‘초하루’에 대해 설명하는 라쿠고 공연 장면과 동시에 다른 하나의 스크린에서는 서예 수업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열 개(開)자를 쓰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 등장한다거나, 술에 취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해학적으로 묘사하는 공연 장면에는 술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에 관해 묘사한 어린이의 그림 소개 장면이 중첩된다. 라쿠고를 관람하는 보이지 않는 관객들의 웃음소리는 초등학생 아이들의 미소와 겹쳐지며, 공연 중 언급된 달의 이미지는 비눗방울 이미지와 환유적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러한 연결점들은 관객의 듣기, 보기 방식에 크게 의존한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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