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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조각들을 ‘얼굴들’로 만들기

글 박시내

황수연 개인전 《허밍 헤드(Humming Head)》 | 3.6~4.17 | 두산갤러리 서울

 

(왼쪽부터) 〈나태(머리)〉, 프린트, 스테인리스 스틸, 62.5×52×60cm, 2019, 〈두 개의 몸과 두 개의 구름〉(부분), 프린트, 철, 173×130×207cm, 2019, 이미지 제공: 두산갤러리

 

《허밍 헤드(Humming Head)》라는 제목은 범람하는 만연체의 전시 제목들 중 단연 청각적 심상을 자극한다. ‘흥얼거리는 머리’라는 단어는 조각에 붙어 전시 전체의 분위기를 보다 가볍게 만들고 각각의 조각을 유기적으로 공명하게 한다. 지면에 제한이 있으니 매체의 강함과 연약함, 또는 조각의 정의나 물질의 고유한 성질 자체에 대해 논하는 것은 건너뛰겠다. 종이가 접히고 접혀 속이 빈 조각이 되는 과정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이 글은 황수연의 종이가 세워져 만들어낸 얼굴의 이미지에 집중한다.

〈나태〉라는 제목의 종이로 만들어진 조각은 신경 써서 만들어진 기다란 봉 형태의 철제 구조물 위에 꽤 안정감 있게 얹어져 있다. 그것은 사람의 품 정도 크기에 곡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입체가 여러 개 맞붙은 듯한 기하학적 모양이다. 작가는 ‘허밍 헤드’라는 전시의 제목을 통해 그 둥그런 종이 조각을 ‘머리’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머리’는 〈나태〉의 또 다른 제목이기도 하다.) 좌우 대칭인 ‘머리’의 가운데 즈음엔 아주 작은 구멍이 하나 있다. 그 구멍은 다른 조각에는 없고, 〈나태〉에만 있다. ‘흥얼거리는 머리’라는 제목은 중앙에 위치한 그 작은 구멍을 계속해서 응시하게 한다. 그러면 그 구멍은 순간 입술을 오므리고 있는 작은 ‘입’이 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입이 모두 다른 입일지라도, 우리가 임의로 표시하고 지칭하는 조각의 위치는 모두 똑같은 부분이다. 조각의 호선, 직선, 튀어나온 곳, 들어간 곳, 납작한 곳, 얼굴의 눈 부분, 코 부분, 입, 이마, 볼, 머리카락으로 유추되는 모서리.

전시장에 들어서면 종이로 만들어진, ‘키가 크거나’, ‘키가 작은’ 조각들이 공간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다. 조각의 몸은 사람의 몸을 시각적으로 전혀 닮지 않았다. 곡선은 인간의 몸 선과는 완전히 다른, 옷을 재단하는 자에 의해 구획되었으며 투박한 직선은 조각의 만듦새를 부각시킬 뿐, 닮음의 인식에 대해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형태는 조각 스스로 조각 이전에 종이였음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특히 조각 겉면의 거친 표면에 대고 배겨 그린 듯한 프로타주 무늬나, 딱딱한 터치로 몇 번 휘갈긴 붓의 흔적이 그렇다. 조각들은 인간에서 유래하지 않았지만, 조각의 형태는 인간을 분류하기 위해 만들어진 몇 가지 단어들과 적당히 붙는다. (서문에 등장하는 ‘얼굴’과 ‘몸’이라는 단어, 그리고 ‘휘파람 부는 머리’나 ‘가족’이라는 단어부터, 작품의 숨겨진 또 다른 제목인 ‘누워있는 꽃 사람’이나 ‘서서’까지 모두 같은 맥락에 자리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나열해보자. 전시장의 초입에 위치한 〈나태〉의 작은 구멍과 전시 제목의 맞물림 때문일 수도 있고, 어긋남 없이 일렬로 쌓이거나 바닥에 놓인 조각의 배열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조각의 크기가 서 있는 인간과 비슷한 크기이기 때문이거나, 조각들 사이로 불뚝 솟은, 관을 연상시키는 긴 조각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한 품 정도 크기가 되는 기하학적 형태의 조각에서 얼굴을 읽으려고 계속 노력한다. 일렬의 긴 형태의 조각들 위에 ‘얼굴’이 놓여 있으면 조각은 ‘서 있게’ 되고, 바닥에 늘어져 있는 조각들 끝에 놓여 있다면 조각은 ‘누워 있는’ 것이 된다.

황수연의 조각은 겉면이 종이로 이루어져 있음을 전혀 숨기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조각의 속이 텅 비어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텅 비어있는 공간은 조각의 내부를 자꾸 상상하게 하는 동시에, 조각의 표피를 아주 얇게 만든다. 이것은 조각을 조각답게 만드는 부피나 공간감보다는 작업을 모두 펼쳤을 때 드러날 전개도의 평면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상상의 전개도는 머릿속에서 전개도를 이루는 호선과 직선들을 다시 나누고 분리시킨다. 머릿속의 불명확한 전개도를 통해 각각의 호선을 서로 맞대 보면, 두 호선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각도와 곡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같은 재단자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고, 같은 재단자로 같은 호선을 그리는 작가의 동일한 제스처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 조각들은 전부 다르지만, 전부 서로 닮아있다.

언급했듯 그 닮음은 조각 자체의 시각적인 같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닮음은 조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발견된다. 동시에, 반대로 조각의 닮은 부분은 모든 조각의 다름을 강조하고 있다. 한 품 정도 크기가 되는 기하학적 형태의 조각에서 우리가 보다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조각들의 닮음과 닮지 않음의 간격뿐이다. 이것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요동치는 우리의 시선 때문이다. 모든 것이 명백하지 않고 눈길을 주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비슷해 보이는 몇 가지 부분에 시선을 고정시키거나, 다른 부분을 눈으로나 쫓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움직임으로부터 유래한 형태는 같은 부분과 어긋나는 부분들을 모두 너그러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닮아서 (또는 닮지 않아서) 서로의 닮지 않은 부분들을 (또는 닮은 부분들을) 오랜 시간을 두고 응시하게 된다. 그러면 그 ‘얼굴’도 우리를 응시한다. 그 닮음의 간격은 늘어났다가 줄어들며,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형태의 (그러나 제각기 다른) ‘머리’라고 지칭된 조각들에 개인의 ‘얼굴’이라는 호칭을 겨우 부여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전시장의 조각들은 크고 작은 ‘얼굴’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조각들이 같음과 다름 사이에 걸쳐져 두 상태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고 있기에 그 조각들은 불완전한 ‘얼굴들’이 된다. 그것이 황수연의 조각들이 연약한 동시에 견고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고, 우리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끝없는 의심으로 내모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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