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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아, 내 나름의 리얼리즘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글 장서윤

방정아, 〈폭격(착시)〉, 캔버스에 아크릴, 145×209cm, 2018

 

1.

한 작가의 개인전, 그것도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열린 전시가 좋다는 말이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는 필자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민중미술 계열 작가로 종종 호명되며, 데뷔 초부터 꾸준히 지녀온 여성주의 시선 탓에 페미니즘 미술 전시와 논의에서도 종종 부각된 그이지만, 이러한 이력과 전시가 ‘좋은 것’과는 분명 다른 문제일 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방정아 작가의 개인전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3.8~6.9)에 대한 호평을 듣고 나서 호기심과 기대감은 점점 부풀어 올랐고, 서둘러 열차표를 예매한 후 방정아 작가와 약속을 잡았다. 비록 문자로 오고 간 말들이지만 한 자 한 자 그의 답문에는 친절이 묻어났고, 그 친절함은 처음 만나는 자리의 낯선 공기를 뚫고 편하게 대화를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전시장을 돌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70대 남성 노인이 다가오더니 작가에게 물었다. (아니, ‘물었다’라기 보다는 ‘조언을 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내 나이가 올해 일흔 일곱인데, 그림이 너무 좋습니다. 첫 전시실에서는 거부 반응이 있었지만, 두 번째 방의 초기 그림들을 보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대단한 삶의 지향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 생각되고, 부산이 아껴야 할 여류라 싶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초기 작업 같은 그림을 지속했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방정아 작가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 그의 표정을 살피는데, 친절하게 웃는 얼굴 한편에 작가의 예술관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단호함으로 대답을 이었다. “하고 싶어도, 이제는 제가 초기의 그 사람이 아니에요. 그때 사람은 지금의 제가 아닙니다. 아마 안 될 것 같아요.” 부드러운 친절함 속 뚝심 있는 강단이 느껴지는 이 답변이 아마도 방정아라는 작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전시 제목이 표상하는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 그의 작품 세계가 무엇일지, 전시장을 경유하여 조금 더 가까이 들어가 보기로 한다.

 

2.

이번 전시는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이라는 제목 아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치열하였다, 그리하였다’, ‘불편하게 다독이는’, ‘없으면 됐고요, 있으면 좋고요’, ‘확장된 세계’라는 5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방정아 작가의 개인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인 12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사용되는 방식인 연대기적 나열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마치 시의 한 구절 같기도 한 각 섹션의 제목 또한 일반적인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그마저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각 전시장 입구 벽에 부착된 부연 설명만이 관람의 단서가 될 뿐인데, 그 단서마저 은유적이고 반어법적이기 때문에 관람자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독해를 수반해야 한다. 이처럼 전시는 애초부터 방정아 작가의 주요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서사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이 역시 닫힌 구조가 아닌 열린 서사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작품의 해석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그렇다면 방정아 작가의 그림에서 서사가 지닌 힘은 무엇일까? 순수한 매체의 자율성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모더니즘 미술가들은 내러티브(narrative)를 거부하며 이를 작품에서 배제하고자 했다. (한국 미술에서 모더니즘이 과연 무엇인지, 모더니즘이 도래한 적은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우선 차치하고) 1970~80년대 일명 ‘단색화’라 불리며 한국의 자연관과 전통에 뿌리를 둔 추상 미학은 한국식 모더니즘이라 명명되었고, 점점 더 정신성을 추구할수록 삶과 일상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소소한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삶과 일상 자체가 서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추구는 결국 삶과 일상과의 단절이기도 했다. 민중미술 작가들이 다시 현실에 시선을 두고 삶과 밀착된 민중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은 이러한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반기였으며, 방정아 작가 또한 이러한 민중미술의 현실 발언적인 태도와 궤를 같이 하며 주변에서 포착된 장면들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아침버스를 기다리는 구로공단의 여성들〉(1991), 〈바다 끝에 선 여인들〉(1993), 〈아줌마는 괴로워〉(1993), 〈급한 목욕〉(1994)과 같은 초기 작업들이 바로 그러한 예로, 현실 발언적이었던 민중미술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여성들의 일상을 방정아 작가 특유의 서사성을 담아 그려냈다. 방정아 작가의 힘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온 몸에 멍을 감추기 위해 문 닫기 직전에 목욕탕을 가야 하는 여성(〈급한 목욕〉), 한 쪽 눈이 부은 채 달밤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는 여성(〈할말은 많지만〉, 1994), 아이를 등에 업고 나와 어묵을 먹어야 하는 여성(〈집 나온 여자〉, 1996) 등 화면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지닌 이 형상들은, 스토리텔링적인 작품 제목과 만나 화면 밖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방정아 작가가 종종 자신의 작업에 덧붙이는 글들이다. “상습적으로 매를 맞아 왔던 여자가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있은 후 그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TV에 나왔다. ‘참 순한 사람인데…. 근데 공중목욕탕에서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녀는 항상 온몸의 피멍을 감추려고 목욕탕 문 닫기 직전 그곳에 갔을 것이다.”라는 작가의 글은, 〈급한 목욕〉의 시작이 결국 현실에서 시작하여 방정아 작가를 거쳐,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에까지 이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3.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시는 이러한 방정아 작가의 초기 작업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작업들은 전시의 두 번째 섹션인 ‘치열하였다, 그리하였다’에 설치되어 있는데, 민중미술과 맞닿은 현실의 기록부터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87세대〉(1996)와 선보러 가기 전 매무새를 단장하는 모습을 담은 〈선보는 날〉(1996), 작가가 처음 아이를 낳고 그린 〈얼떨떨했어요〉(1999)처럼 여성이자 엄마로서의 일상적 삶의 단편들은 첫 번째 전시 섹션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경유한 후에야 감상이 가능하다. 이는 전시에서 퍽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인데, 사회와 현실에 대한 섬세한 인식이 정치, 사회적 문제로 확장되고 있는 최근 작업들이 첫 번째 섹션에 포진되어 전체적인 전시 분위기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섹션에서 주목되는 것은 원전 문제를 다룬 〈원전에 파묻혀 살고 있군요〉(2017)나 〈월성〉(2016), 〈핵헥〉(2016)부터 전쟁의 상흔을 주목한 〈폭격(착시)〉(2018), 〈과거에 묶인 사람〉(2018), 〈거친 삶 70년〉(2018), 국정농단을 암시하는 〈기묘한 대화〉(2017), 미투(MeToo) 운동과 원전의 풍경이 교차하는 〈꽉〉(2017)까지 환경, 4대강, 핵, 세월호 사건 등 정치사회적인 맥락에 시선을 두는 작가의 태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면에서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이 직접적인 발화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사건이라고 해서 결코 개인/군상이 사건 안에 함몰되거나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은 화면 속 인물들로 인해 징후적으로 가시화된다. 이 말인 즉슨 사건의 모습이 그 자체로, 직설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즉, 전쟁의 상흔은 개와 산책하던 평화로운 오후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진 것으로 인해 흐트러졌고(〈폭격(착시)〉), 분열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풍경(아마도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진 강인 듯하다.) 앞에서 한 여성은 분열(〈분열〉)된다.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선명한 혹은 파스텔 톤의 밝은 색감이지만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선(산책하던 개는 놀라서 부풀어 올랐다!)이나 형상의 윤곽을 뚜렷하게 지탱하지 않는 색면은 흘러내리며 알 수 없는 긴장과 공포를 조성한다(종종 작품 속 인물들의 눈이 공허하게 처리되는 것도 이러한 공포감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작품이 배경으로 하는 현실 공간은 뒤틀리고 왜곡되어 초현실주의적인 특징까지 드러나는데,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시 작가의 상상을 기반으로 그린 〈City〉(2011)나, 한쪽 팔이 잘린 여성과 호랑이가 인공적인 정원에 놓여 있는 모호한 세계 〈Forest〉(2011)가 이질적인 형상들이 충돌함으로써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면, 최근에 제작된 작품들에서는 선과 색면의 조형 언어들이 더 적극적으로 역할하며 또 다른 차원의 초현실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초현실적인 요소는 여성주의적 시선과 관세음보살로 표상되는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적 시선 그리고 예술가라는 개념과 만나 변주되기도 했다. 중생과 부처를 잇는 매개자인 관세음보살과 여성, 그리고 예술가가 복합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작업들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방정아 작가가 예술가로서 지녀야 하는 역할과 태도에 대한 성찰이 은유적으로 표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리한 감각과 속이 깊은 눈으로 삶과 세계를 감지하는 예술가들은 지친 중생들의 삶을 위로하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중재자이자 매개자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세상에 보살필 일들이 많”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쁜 관세음보살〉(2010)이나 “인위적인 공간을 지나가는 물길들”을 살피며 “손바닥을 펴서 청량함을 비”는 〈이상하게 흐른다2〉(2010)의 관세음보살은 마치 종교적인 제의가 진행되는 신전과도 같은 어두운 공간 4면을 둘러싸며 관람객과 조우한다.

 

4.

이처럼 현실을 기반으로 한 초현실, 불현듯 현실을 뚫고 나타나는 초현실적인 상황들이 방정아 작가의 작품 세계에 담겨 있으며, 이는 “내 나름의 리얼리즘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일반적인 민중미술에서 논의되는 ‘리얼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리얼리즘을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김영 독립연구자가 평한 것처럼 “리얼리즘의 족보를 찢거나 불태”우고 “기존의 리얼리즘은 다루지 않았던 ‘잠재적인 것’”, “현실화되지 않은 어떤 힘”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의 대안적 리얼리즘 말이다.

때문에 방정아 작가의 작업 스타일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10여 점 정도의 관세음보살 작업은 2010년도 한 해 동안 그려진 것으로, 당시 비관적이고 어두운 사회 분위기에서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후 이 작업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지만(작가는 할 만큼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재래시장 골목에 위치한 사교 댄스장에서 춤추는 남녀를 그린 〈현대스포츠〉(2012)에서 관세음보살을 닮은 인물 형상이나 손처럼 힌트로 지속되기도 했다. 형식 또한 마찬가지다. 때로는 구상회화에 충실히 인물과 배경을 자세하게 그리기도 하는 반면, 때로는 화면의 공간감을 상실시키며 평면성을 극단적으로 밀고 가거나 붓터치를 배제함으로써 일러스트적인 효과를 내기도 한다. 헬스장의 미묘한 풍경을 담은 〈회원등록〉(2011)이나 〈샴 쌍둥이〉(2012), 〈그해 겨울〉(2013)과 같이 일러스트적인 요소가 부각된 작품들이 관세음보살을 그린 후 불과 1, 2년 뒤의 작품이라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같은 2017년에 그린 그림이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구상적인 〈꽉〉과 달리 목욕탕에서 세신하는 여성들을 그린 〈고요함 속 쓱싹쓱싹〉이 더 단순한 선과 색채로 표현되었고, 캔버스에 아크릴이 아닌 종이에 오일 파스텔을 사용한 〈막힌 물〉(2017)처럼 매체 사용의 변화도 있어왔다. 2000년대 초기부터 현재까지 회화와 병행하며 다양한 영상 작업들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획일적으로 보여지는 것들을 경계”한다는 방정아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 지금까지 그의 작업을 이끌어온 원동력으로 작용했음을 넌지시 드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부정은 아무런 토대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테면, 비록 붓의 터치나 구체성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초기 작업인 〈할 말은 많지만〉, 〈집 나온 여자〉, 〈선 보는 날〉의 인물 형상에서 일러스트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으며, 최근 그의 화면에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선의 활용은 물구나무 서기하는 여성의 몸의 변화를 선적으로 드러낸 〈녹색해일〉(2005)부터 해변가를 바라보는 여성의 움직임을 다분할된 선으로 시간성을 구현한 〈아무말 하지 않아서 좋았어〉(2018), 그리고 심리적인 불안과 분열을 선으로 드러냈던 〈샴 쌍둥이〉(2012), 〈이석증〉(2018)으로 나아간다. 방정아 작가는 결국 자신의 과거에 잠재되어 있는 요소를 현재로 불러내어 새로운 이미지로 창조한 것이며, 이는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로 방정아 작가의 작품세계를 재단할 수 없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섯 개 섹션의 작품들을 칼로 재단하듯 나눌 수 없는 것도, 각 섹션에 설치된 작품들의 시대가 다양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테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작품들이 시기를 가로지르는 배치 안에서 방정아 작가의 작업을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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