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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 너와 나의 궤적이 만나는 순간

글 백지홍

박찬국 작가  ⓒ김흥규갤러리 미술세계는 신진작가를 지원하는 ‘미술세계 프론티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박찬국 작가의 기획초대전 《PATH FINDER》(5.12~5.20)를 개최했다. 작가의 12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는 2013년 이후 내면과 외면, 그리고 움직임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개인의 존재와 그러한 개인들이 만나고 부딪히는 사건의 순간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회화 시리즈의 대표작들을 선보였다. 7년간 지속해서 확장하며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박찬국 작가의 세계관을 소개한다.

 

선으로 이뤄진 나와 너

백색의 배경 위로 그어진 검은 선, 또는 여러 선들이 뭉쳐 만들어진 면이 있다. 선인 경우에도 면인 경우에도 그 대부분의 모양은 원이다. 이 원들을 만들어낸 이는 박찬국 작가다. 그는 목탄으로 선을 긋는다. 대형 캔버스에는 말 그대로 온몸을 이용해 겨우 그렸을 듯한 선들이 이어져 있다. 완성된 작품이 담긴 정지된 캔버스에서도 선을 그었을 때의 움직임이 목탄의 거친 질감과 함께 느껴진다. 박찬국 작가의 첫인상은 이렇다.

박찬국 작가는 왜 선을 그었던 것일까. 그가 2013년 이래 지금까지 만들어온 작품들은 전체를 하나의 연작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 큰 틀 안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 왔다. 그는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며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고, 작품을 제작하며 주제가 확장되었으며, 그렇게 확장된 주제를 다시 작품에 반영하는 과정을 반복해왔다. 그렇기에 세부적으로 살펴본다면 7년간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고도 할 수 있을 박찬국의 작품들은, 그 변주에도 불구하고 초기작과 최근작까지 하나의 주제를(작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계관’을) 이뤄왔다고 볼 수 있다. 즉 2019년의 작품은 2013년의 작품이 자리잡은 바로 그곳에서 출발하되 더욱 촘촘하며 확장된 세계를 담고 있는 발전된 버전인 것이다. 그의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박찬국의 세계관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선들이 뭉쳐 만든 원이다. 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이 원은 개인의 반경을 의미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처럼 말이다. 이는 물리적 공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생각, 감정, 사상 등이 담긴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상징하기도 하며, 조금 더 의미를 넓히면 한 인간이 활동하는 반경의 상징이 된다. 박찬국 작가는 이러한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성향을 ‘움직임’으로 보았기에 그의 작품에서 선의 움직임은 원을 이루는 단순한 구성요소를 넘어 핵심적인 표현으로 작품의 정면에 등장한다. 원의 윤곽을 이루고 있는 선들은 ‘우리 내부의 움직임이 세상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외부로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1. 박찬국, 〈The path of contact#8〉, 캔버스에 목탄, 대리석 가루, 259.1×193.9cm, 2014

 

이러한 원들이 또 다른 원과 만난다. 개인이 가장 안정적으로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때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자신의 원 속에 침잠해 들어갈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만나야 한다. 홀로 있을 때에는 감각되지 않는 존재가 빛을 발할 때는 충돌을 통해 서로를 만났을 때이다. 박찬국 작가는 이러한 만남의 순간을 ‘사건’이라 칭한다. 2014년 발표한 〈The path of contact(접점궤적)〉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사건에 대한 관심과 그 표현 방식이 당시에 어느 정도 틀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그의 캔버스에서 사건들은 원과 원의 만남, 부딪힘, 겹침 등을 통해 표현된다. 때로는 크게 부딪혀 파열음을 내고, 때로는 한 원이 다른 원을 압도하며, 때로는 두 원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 우리의 만남이 그러하듯, 이러한 원과 원의 만남은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작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타인과의 만남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처럼 원들의 만남은 작가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 바 있다. 지구 궤도를 떠도는 인공위성의 궤적이 우연히 겹칠 때가 있듯이, 각 개인의 삶의 궤적이 우연히 타인의 궤적과 겹치는 순간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무겁고 거친 느낌의 검은 그림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 낭만적인 비유만큼 그의 세계를 잘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여기까지가 박찬국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이다. 왜 그는 땀을 흘려가며 원을 그려야 했는지, 그리고 그 원들은 왜 다른 원들과 만나야 했는지 생각하고 작품을 바라본다면 새삼 다른 느낌을 전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나를 구축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며, 너와 만나는 긴장감 속에 기꺼이/때로는 피할 수 없이 뛰어드니 말이다.

 

박찬국, 〈Accumulated flow #5〉, 캔버스에 목탄, 진주, 호분, 아크릴, 91×91cm, 2019

 

너와 내가 만든 세계

수많은 선들이 한 지점을 지난다. 이곳에서 이야기가 탄생하고 더욱 많은 선들이 지나가면 이야기는 전설이 된다. 박찬국 작가의 세계관은 이제 너와 내가 만난 세계가 어떤 모습을 갖추고 움직이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된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너와 내가 있고 이들은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우리의 관계는 〈Vortex(소용돌이)〉처럼 서로 엉켜 더욱 거대한 덩어리를 만든다.

세계관 확장에 앞서, 박찬국 작가가 이 모든 세계를 만들어낸 시작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나가자. 세계관의 시작은 그가 작가로서 삶을 꿈꾸던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로서의 삶을 꿈꾼 그는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평생 품고 가야 할 질문이었다. ‘작가란 무엇인가’, ‘작품이란 무엇인가’, ‘전시란 무엇인가’, ‘관람객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는 이 질문이 너와 내가 만나는 세계를 만들었다. 그는 작가란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이자 플랫폼이며, 작품은 그 이야기꾼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이자 흔적이고, 전시는 그러한 이야기와 흔적을 가지고 타인과 만나기 위한 공간이라 결론 내렸다. 물론 관람객은 만남의 주인공이다. 작품이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만들어내는 사건 자체가 되는 것이다. 현재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관의 기본은 이미 이때 정립된 것이다.

박찬국 작가의 세계는 이제 너와 나의 만남의 순간을 넘어서 그러한 만남들이 만들어낸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만남을 통해 변화한 나라는 존재와 만남들이 나의 외부에 만들어낸, 남겨놓은 것들이 근작들에 찾아온다. 근래에 제작된 〈Spindle(방추)〉 연작에서는 개인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원이라는 도형이 다른 도형과 만나 만들어내는 방추형의 형상이 작품의 중심에 나타난다. 원이 특정한 순간의 인간을 표현한다면 방추형은 시작과 끝이 있는 인간을 뜻한다. 작게 시작하여 점차 부풀어 오르다가 다시 수축하여 결국 소멸하는 방추형의 모양은 실제로 인간이 평생에 걸쳐 생산하는 것들을 시각화한 그래프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작가는 이를 생명력으로 표현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생명 형태인 짚신벌레와 같은 단세포 생물의 형태와의 유사성은 그의 설명에 설득력을 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근원적 생명력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두 원이 겹치는 공간에서 방추형 모양이 만들어진다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우리의 만남을 통한 사건 대부분은 시작과 끝을 가진 방추형으로 기억되곤 하니 말이다.

이렇게 기억되는 사건들이 단순히 너와 나만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보다 단단한 형태를 가지고, 개별 개인의 기억을 넘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선보이는 또 다른 근작들에서 나타나는 평면들은 우리의 만남이 만들어냈지만, 우리의 밖에 존재하는 것들을 뜻한다. 군중심리, 유행, 도덕, 법 등의 요소들 말이다. 작가는 이들이 단단하며, 개개인의 존재와 달리 유연하지 않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러한 개념들을 캔버스 안에서 표현한 것이 〈Konstitutiv kategorie(구성 카테고리)〉, 〈Captured kategorie series(캡쳐된 카테고리 시리즈)〉, 〈Ambiguous kategorie series(애매모호한 카테고리 시리즈)〉와 같은 작품이다.

박찬국 작가는 가장 인공적으로 느껴지는 ‘사각형’을 통해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드러냈다. 그래서인지 원, 원과 원의 만남, 방추까지 이어지던 움직임을 표현하는 드로잉적 요소가 사라졌다. 그것을 대신해서 화면을 차지한 것은 흡사 앵포르멜 회화와 같은 질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딱딱하고 변화하지 않음의 상징인 사각형들의 형태가 일그러져 있다는 것이다. 개개인을 표현할 때에는 완전한 원형에 가깝게 그려왔던 것을 생각하면 의도적 변화다. 작가는 이에 대해 우리가 완벽한 것 혹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 느끼는 것들도 불완전한 것임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납득이 되는 설명이지만 단순화된 기하학적 형태와 목탄 드로잉으로 표현된 움직임이 조합된 미감을 전하던 작가의 세계관으로부터 미끄러지는, 어딘지 낯선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너와 나의 바깥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미감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던 것일까.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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