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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산책자들

글 유재연

유재연, 〈Night Walker〉, 캔버스에 유채, 60.6×50cm, 2016

런던에 온 뒤로부터 이곳 일상의 주를 이루는 행위는 ‘걷는’ 행위가 되었다. 교통비가 비싸기도 하고 대부분의 지역이 평평한 지대로 이루어진 이 도시에서 하루에 이만 보 정도 걷는 것은 이제 아침 세수를 하는 것과 비슷한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 도시에 오기 이전에도 걷는 행위는 나의 삶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이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나에게 조금 특별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린 풍경. 풍경은 느리지만 나의 시선은 천장과 차창에 제한되지 않은 채 빠르게 움직인다. 강물의 높이가 어느 시간에 어느 정도로 천천히 차오르는지, 새들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날아가는지,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의 굉음과 그 실루엣의 크기는 어느 정도 비례하는지, 그리고 계절마다 밤이 되는 시간과 색이 다르다는 것 등 걷는다는 행위 덕분에 더 보고 더 알게 되는 것이 많아진다.

그러다 보니, 나와 같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걷는다’는 행위는 대부분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이었다. 일터에 가기 위해,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집에 가기 위해, 또는 운동을 하기 위해서. 걷는 이유는 가지각색이겠지만.

그림들에 등장하는 걷는 사람은 주로 철저히 혼자 등장한다. 그리고 밤에 걷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목적 없이 걷는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걷기’와 사뭇 다르다. 날이 어두워지면 런던 대부분의 공원은 입구를 잠그고 출입을 차단한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애매한 시간까지 오래 머물다가 출구들이 모두 닫혀버리는 바람에 넓은 공원에 갇히기도 한다. (담을 따라 걷다 보면 담벼락이 낮은 구역이 있어 원하면 담을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 넓은 공원 수색을 하지 않고 문을 잠그는 것 같다.) 불현듯 공원에 갇히게 되어, 담을 넘을 수 있을 만한 낮은 담장을 찾다 어쩔 수 없이 강제 밤 산책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이 좋아서 가끔은 일부러 담을 넘어 밤의 공원에 들어가 보곤 했다. 가로등마저 잠든 공원은 생각보다 많이 어둡고 조용하다. 가끔은 여우나 너구리를 만나기도 하고 공원에서 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이 넓은 공원에 나 혼자라는 느낌을 지닌 채 걸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 밤의 공원은 나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발달시키고 내면세계에 침잠된 생각들을 깨운다. 이내 기억과 망각이 뒤섞이게 된다.

유재연, 〈Night Skater〉 유화 애니메이션, 싱글 채널, 컬러, 사운드, 4분 50초, 2019

해가 저물고 공원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피크닉을 하던 사람들이 점점 떠나가고 온기로 가득했던 공원은 어느새 차가운 밤공기로 뒤덮인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밤의 공원을 가로지르는 사람. 발구르기를 멈추기. 휴대폰을 스크롤 다운. 다시 발 구르기. 발 구르기를 멈추기. 휴대폰을 스크롤 다운. 다시 발 구르기. 어느 순간 밤의 공원의 적막은 시끄러운 벌레들의 울음 잔치로 전복된다. 곳곳에서 땅이 솟아나고 작은 둔덕이 생긴다. 그곳에서 온갖 곤충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작업을 통해 지각(perception), 파열(rupture), 인지(cognition)의 과정을 밤의 공원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로 구성한다. 이것은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불일치, 혹은 존재와 인식 사이의 괴리 등 현대인들이 흔히 가지고 살아가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이야기이다.

표피적인 행위들로 가득 찬 공허한 공원의 밤. 밤의 촉각적 감각의극대화, 개인의 망상, 공포, 환영. 밤의 현상과 개인의 상상계가 충돌하는 지점. 화면에 철저하게 혼자 등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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