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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어쩌면...있을지 몰라

글 김정현

《정물화전(Tarte: Still-life Exhibition)》 | 5.15~6.30 | 시청각

(위) 양아영, 〈냅킨〉, 〈계량컵〉, 〈테이블〉, 〈조명〉, 〈버터〉(왼쪽부터) / (아래)김대완, 〈쉿, 원근법인 나〉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시청각

 

하나. 정물화와 정물화전

오랜만에 시청각에서 직접 기획한 전시가 열렸다. 《정물화전》이라는 제목은 얼핏 장르전을 새삼스럽게 표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획자 현시원은 전시 서문에서 근대 화가 이도영의 사생화론을 김예진의 논문에서 재인용하고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수박도〉를 연구한 미술사학자 이마하시 리코의 논문을 언급하며 정물화를 다루는 변화한 언어를 예시하고, 김대환, 김익현, 양아영, 정희민, 차승언 5인의 작가와 함께 오늘날의 변화한 시선을 모색하려고 한다. 구태스럽게 전통적인 장르적 틀에 맞추는 기획이 아니라면 이 전시에서 ‘정물화’는 어떻게 소환되는가? 여기서 전시 제목이 ‘정물화’가 아니라 ‘정물화전’이며, 영문은 ‘Tarte: Still-life Exhibition’으로 ‘타르트’라는 모티프가 슬쩍 얹혀있다는 점은 사소하게 넘길 수 없다.

우선, 정물화와 정물화전을 구별 짓는 의식으로부터 메타 정물화라는 관심, 즉, 정물을 보는 감각에서 정물화를 보는 감각으로의 이동이라는 측면이 감지된다. 정물화(Still life)는 16~17세기에 서양미술사의 전통으로 정립되었고 동양에는 19세기 전후에 전파되었다. 이도영은 근대 서화의 개척기에 스승인 안중식과 동기인 고희동과 함께 전통적인 서화의 개념에 서구적인 정물의 개념을 접목하여 수용했다. 동양에도 기명절지도와 같이 특정한 사물을 그리는 관습이 존재했지만, 서구에서 유화 물감이라는 재료의 발명이 정밀한 광학적 재현의 역사를 주도해온 것과 달리 동양의 서화에서 사물의 재현은 보다 관념적 영역에 속했다. 그 전환기에 이도영과 고희동이 한 화면에 함께 그림을 그리고 스승인 안중식이 제발을 남긴 〈기명절지도〉(1915)1를 보면 이도영의 전통화법과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고희동의 서양화법이 어우러지며, 수박, 옥수수, 고추, 물고기, 주전자(고동기)와 같은 사물의 정확한 외양보다 그것을 그린 두 사람의 상이한 필치가 눈에 띈다. 운치 있지만 전형적인 소재보다 ‘어떻게 볼 것인가’와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둘 또는 셋의 대화를 상상하게 된다.

이렇게 정물화를 다시 질문한다는 것은 유독 전통적인 정물화가 자주 불러일으키는 반응, ‘너무 똑같다’는 감탄이나 ‘이게 뭘 그린거지’하고 형태를 꿰어 맞추려는 소재나 내용에 대한 페티시(fetish)를 잠시나마 멈추고 ‘어떻게 볼 것인가’와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탐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전시도면 기록상 《정물화전》의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양아영의 〈직선 경험〉(2019)에서 화면 하단의 하얗고 둥근 형태를 사과 따위의 과일로 인식하려는 눈의 습관은, 설령 그것이 틀리지 않았더라도, 일단 정지를 요청받는다. 잠시 간격을 두고 나란히 건 그림 다섯 점의 제목은 〈냅킨〉, 〈계량컵〉, 〈테이블〉, 〈조명〉, 〈버터〉와 같이 ‘직선 경험’과 대조적으로 즉물적이고 선명한 구상 명사이다. 물감이 흘러내리며 뒤엉킨 작은 화면에서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제목에 지시된 사물을 찾아보는 아둔한 과정에서 명료해지는 것은 사물-명사의 불명료함이다. 전시 서문에 인용된 “내면화된 정물화”라는 작가의 표현을 참고하여, 관람자가 볼 수 있는 건 작가의 내면이 아니라 각자의 선행 관념과 ‘전혀 똑같지 않은’ 것으로서의 정물화이다. 이에 관해 정희민의 작품 제목 〈어쩌면 두 개의 태양이 있을지 몰라〉(2019)의 문장 구조를 차용하여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하나. 어쩌면 정물화가 있을지 몰라.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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