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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반짝이며 되살아나는 것들

글 권태현

《안톤 비도클: 모두를 위한 불멸》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4.27-7.21

안톤 비도클,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 HD 비디오, 34분, 2017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입구에 작은 푯말이 하나 서 있었다. 설치된 영상 작업의 반짝임을 조심하라는 경고문이었다. 공립 미술관 전시장에 종종 붙어있곤 하는 이미지의 내용에 대한 주의가 아니라, 작업이 내뿜는 섬광을 조심하라는 글귀는 처음이라 유독 눈에 밟혔다. 빛의 점멸에 남달리 민감한 사람들이 있겠지 하며 넘어가려 했는데, 쉽게 떨쳐지지 않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정말로 미술이 우리에게 그토록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일까? 고작해야 빛을 내거나, 그것에 반사되어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미술관 속 블랙박스의 유령들이 말이다.

《모두를 위한 불멸(Immortality for All)》은 『e-flux』의 설립자이자 편집자로도 잘 알려진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 b.1965)의 이른바 러시아 코스미즘(russian cosmism) 3부작을 위한 전시이다. 이번 전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 러시아 코스미즘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전시가 작업들만큼이나 러시아 코스미즘 자체를 내보이기 때문이다. 분리된 공간에 3개의 영상들이 각각 설치되었고, 그 중간에는 러시아 코스미즘의 역사를 정리한 연보와 그것의 핵심적인 텍스트들을 살펴볼 수 있는 꼭지가 비중 있게 마련되어 있다.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에 이끌려 놓여있는 책들을 읽다 보면 작업을 보는 시간만큼 글을 읽는 것에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이다.

러시아 코스미즘은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 같은 주제를 사뭇 진지하게 논하는 사유의 틀거리이다. 그것은 19세기 말 러시아의 니콜라이 표도로프(Nikolai Fedorov, 1829~1903)를 비롯한 일련의 논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는 맑스(Karl Marx, 1818~1883)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같은 사상들이 수용되어 신으로부터의 불멸과 사후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버린 이후였다. 사람들은 필멸을 받아들이고, 제한된 세계와 시간 속에서 존재를 사유했다. 당시의 혁명적인 예술 실천들이 세계를 진보한 기술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는 그러한 바탕이 있었다. 쉽게 독일의 바우하우스,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러시아 코스미즘 역시 그러한 운동들과 궤를 같이하지만, 신에 의한 불멸이 깨져버린 세계에서 기술을 통해 다시금 불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전 인류가 우주적 차원의 총체적인 권력을 수립하여 모두를 위한 불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모두’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과거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정식화된 사회주의는 미래에 도래할 유토피아를 위해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체제였다. 그렇기에 진정한 평등과 정의는 죽어간 사람들을 미래의 유토피아에서 되살려 놓아야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러시아 코스미즘은 불멸의 문제를 신의 손에서 사회의 손, 심지어 정부의 손으로 옮겨오는 급진적인 정치적 기획이 된다.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b.1947)는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논하는 근대적 생명 정치와 그것을 겹쳐놓기도 한다. 근대 국가의 생명 정치가 인구 차원에서 출생과 건강까지 통치하려는 것이라면, 러시아 코스미즘적 비전의 국가 권력은 불멸이라는 이름으로 죽음까지도 통제하는 급진적 생명 정치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푸코가 그렸던 근대 국가의 사적이고 제한적인 생명 정치가 아닌, 모두를 위한 총체적인 생명의 권력을 꿈꿨다.

그러나 코스미스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코스미즘은 소비에트 정권에서도 탄압을 받았고, 냉전 시대 우주개발 정책과 연결된 연구를 제외하고는 오랜 시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러시아에서도 19세기의 코스미즘 고전들이 다시 정비된 것은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b.1931)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재편),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 정책 이후였고, 그것이 영어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러시아 코스미즘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는 경향의 중심에 미술계 담론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보리스 그로이스와 안톤 비도클은 『e-flux』를 통해 러시아 코스미즘 텍스트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고, 작업으로도 다루며 일종의 포교 활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왜 지금 미술계는 러시아 코스미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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