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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AL TECHNE

‘어디에나 있는’ 헤테로토피아를 부유하는 납작해진 현대미술

글 안진국

크리틱컬 테크네 (critical τχνη)를 향하여 : ‘테크네의 귀환’ 이후 예술①

‘어디에나 있는’ 헤테로토피아를 부유하는 납작해진 현대미술

: 납작(flat), 디지털-인터넷, 편재성, 사악한 혐오 기계, 억압적인 의지

※본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게재되었습니다.

1518년 출판된 『유토피아』에 실린 암브로시우스 홀바인(Ambrosius Holbein)의 삽화

발광하던 컴퓨터 스크린이 오작동으로 꺼지는 순간 우리는 흠칫 놀란다.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검은 스크린에서 뭔가에 홀려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블랙미러(Black Miror). 검은 거울이라 불리는 디지털 전자기기의 화면. 디지털 사상가 니콜라스 카(Ncholas Carr)가 ‘유리감옥(The Glass cage)’이라 말한 그곳. 전자기기의 화면은 늘 화려하게 빛난다. 하지만 그 실체는 검은 거울이고, 검은 거울이 등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기술에 홀려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과연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로미 아키투브, 카밀 어터백, 〈문자 비〉, 상호작용적 비디오 설치 작품, 1999 ©1999, Romy Achituv and Camille Utterback, 이미지 제공: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참을 수 없는 미술의 납작함
디지털 환경을 상징하는 단어 ‘납작(flat)’은 근 몇 년간 한국 미술계에서 종종 포착되곤 했다. 이 단어는 젊은 시각 예술가들 사이에서 자주 호출된다. 아마도 디지털 전자기기가 우리의 삶 전역을 지배하는 현재 상황을 ‘납작’ 만큼 잘 대변하는 단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디지털 환경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 디지털 화면처럼 납작하게 눌려 SNS에서 전시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디지털 환경을 매끈한 표면의 납작함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유리감옥이라는 그곳을 단순히 ‘깊이 없음(납작)’으로 퉁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이 시각 예술에서 ‘납작’은 개념적으로 그리 신선하다고 할 수 없다. 이 개념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말한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이나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의 ‘슈퍼플랫(Superflat)’을 바로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납작’이 현재의 매체 환경을 대변하는 깃발처럼 펄럭이지만, 알고리듬이나 렌더링(rendering)을 사용한 이미지 실험, 맥락이 제거된 이미지 차용, 무작위적인 이미지 축적 등 ‘납작’을 흔들며 진군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선보이는 작업은 매체 환경을 아우르기보다는 감각적인 경험을 유희하는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이미지 실험의 결과물도, 이미지 차용도, 이미지 축적도 대부분 여러 차례의 작업과정에서 생성된 다수의 결과물 중 조형적으로 유의미한 몇몇을 (작가가) 취사선택하여 작품화한다는 점에서 시각 조형성에 중심을 둔 추상표현주의의 디지털 버전 정도로 보인다. 그렇기에 평면회화의 당위성을 유지하려고 ‘납작’으로 회화의 평면성을 브랜딩한 업그레이드 된 형식주의라는 혐의가 짙다.
어떤 이는 ‘납작’이 디지털 시대에 납작해진 개인의 삶에 대한 사회적 측면도 함의하고 있기에 개념적으로 새롭지 않다고 폄하하는 것에 못마땅해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기술 내부로 좀 더 깊이 침전하여 그 밑바닥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봤으면 좋겠다. 기술의 표피를 부유하며 기술적 현상을 바라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술 매체의 강제성(억압적인 의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현재의 매체 환경을 진단하거나, 대변하거나, 비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술은 결코 납작하지 않다.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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