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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떨림 이후에 오는 것들

글 장서윤

《척추를 더듬는 떨림(A Shiver in Search of a Spine)》 | 7.11~10.5 |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

카시아 푸다코브스키, 〈복수[The Revenge(Panel 29)]〉(부분), 혼합매체, 200×172×30cm, 2019, 이미지 제공: 아라리오갤러리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후유증으로 인해 삶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인 위험들―그것이 현실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을 늘 세심하게 살피는 사람이다. 침대 위치나 자물쇠의 작동 여부는 물론, 마늘을 걸거나 허브를 태우고 소금을 뿌리는 데까지 생각이 도달한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지녔던 ‘귀신을 보는 능력’, “너도 곧 그 능력을 물려받을 거야.”라는 할머니의 예언은 주인공의 불안감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때문에 어두운 밤, 오래된 건물, 영혼들의 주의를 끌만한 골동품들 또한 그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경계 대상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 남부 지방의 한 오래된 성에서 진행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주인공은 그곳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미로 같이 얽힌 수많은 방을 지날 때의 오싹함은 물론이거니와 오랫동안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초상화, 가구, 그랜드피아노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하지만 기운으로만 감지했던 이상한 일은 결국 발생하고야 만다. 다락문이 잠기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 방안의 창문과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밤이 되자 이상한 노크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주인공은, (드디어!) 못에 박힌 죽은 고양이를 다락방 기둥에서 발견하게 된다. 늘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곳이었기 때문에 만약 과거에서부터 죽은 고양이가 거기에 있었다면 못 봤을 리가 없는 장소였다. 게다가 고양이 아래 검정색 글씨로 “OUT”이라 쓰여 있기까지 했으니, 누군가는 이들의 방문이 꽤나 거슬렸던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예상과 다르게 전개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다른 작가들을 직접 데리고 올라가 죽은 고양이를 확인시켜 주고, 그들이 충격을 받는 데서 묘한 즐거움을 얻는다. 심지어 죽은 고양이를 매일 확인하면서 그것이 더 이상 환영이 아닌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흥분감마저 느낀다. 어쩌면 ‘척추를 더듬는 떨림’은 공포 그 자체보다 이처럼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가 매혹으로 바뀌는 순간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이 이야기는 이번 전시 《척추를 더듬는 떨림》1의 참여 작가 카시아 푸다코브스키(Kasia Fudakowski)의 에세이 「척추를 더듬는 떨림-방 고르는 이야기」의 큰 줄거리이다. 그리고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듯이 이번 전시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명확하게 지시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느낌. 그리고 이러한 ‘이상한 감각’은 친숙한 오브제 이면의 숨은 이야기들을 만났을 때 더 강하게 작동한다. 굳이 ‘언캐니(uncanny, 친숙한 낯섦)’와 같은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순간을 종종 마주하곤 한다. 꼭 그것이 푸다코브스키처럼 공포스러운 상황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전시의 제목은 비록 푸다코브스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기는 하지만, ‘척추를 더듬는 떨림’의 감각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감각이라는 점에서 전시에 참여한 다른 세 명의 작가 솔 칼레로(Sol Calero), 페트릿 할릴라이(Petrit Halilaj), 조라만(Zora Mann)과 느슨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이번 전시가 좀 더 흥미로운 것은, 친숙한 오브제 뒤의 이면처럼 이전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일상에 잠식하는 존재들을 문득 깨달았을 때의 오싹함을 공동체, 사회 구조, 역사적 맥락과 연결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과 감각이라는 미시적인 이야기와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거시적인 이야기가 교차하는 곳에서 일단락되었던, 혹은 종결되었던 이야기들은 다시 열린 구조를 향한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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