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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공간과 시간의 교차, 시대여관의 포트레이트

글 김솔지

《플래시포워드 플래시백》 | 8.1~8.24 | 시대여관

한수진, 〈3호선〉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류혜민 큐레이터

사진을 구매한다. 눈밭을 뛰어노는 아이의 얼굴 위에 다른 아이의 얼굴을 포갠다. 존재하지 않는 어느 아이의 모습이 나타난다. 정지윤은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전단을 보고, 자신이 가진 단서들로 아이를 찾아 나선다. 실제로 아이를 찾는다기보다는 한 줌의 정보로 아이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일에 가깝다. 그는 구입한 사진으로 가상의 아이 모습을 시각화한다. ‘실종 아동 사건’이라는 사회의 실제적인 일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사진 작업에 가닿는다. 정지윤은 〈눈〉(2019)이라는 설치작업에서 그 일을 간접적으로는 겪는 개인의 감각과 감정을 그려낸다. ‘그 아이가 뛰던 때는 언제였을까.’ 시간대를 가늠하는 일부터 쉽지 않다. ‘어느 겨울 첫눈이 내리고, 아이는 눈 위에서 종종 거리며 뛰었겠지, 첫눈은 언제 내렸을까’, “하루 전에, 이틀 전에, 사흘 전에 (…) 스물 아흐레 전에 첫눈이” 아니, “스물 아흐레 전에, 스물 여드레 전에 (…) 하루 전에 첫눈이 내렸다.”

어떤 시간은 점점 멀어지고, 어떤 시간은 점점 가까워진다. 아이의 모습은 희미하게 멀어져 가지만 아이를 잃은 아픔은 갈수록 거세진다. 시간은 가지만, 한편으로 시간은 오고, 그 가운데 사진이 있다. 매 순간 우리는 눈앞에 대상을 맞닥뜨린다. 눈에 밀착한 카메라 앞에 무엇인가가 놓여있다. 사람이든, 공간이든, 허공을 가로지르는 공기든, 피사체는 나뭇잎이 한 번 흔들리는 찰나, 햇빛이 하늘에서 나뭇잎으로 떨어지는 순간의 짧은 시간 동안 빛을 담아낸다. 그렇게 세상의 순간은 크롭되어 사진 이미지가 되고, 그 이미지의 앞과 뒤로 시간이 흐른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고정한 ‘사진’을 매개로 균질한 질서에서 벗어난 시간과 공간이 접합하며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수진, 홍희라, 정지윤의 포트레이트
정지윤의 〈눈〉은 동대문 골목에 자리한 ‘시대여관’에서 열린 《플래시포워드 플래시백》 전시 동선의 마지막에 있다. 이 전시는 류혜민이 기획하고 한수진, 홍희라, 정지윤 세 명의 젊은 사진가가 참여한 사진전이다. 공교롭게도 전시는 올여름 중 가장 더운 날 문을 열었다. 이글거리는 햇볕 아래 에어컨 없는 낡은 공간에서 기획자와 사진가, 사진과 관람객이 조우했다. 쪽방 형태의 여관은 작은방이 촘촘히 이어져 마치 기차를 연상시키고, 곳곳이 뚫린 벽은 작품 하나에 빠져드는 관조적 감상을 불가능하게 했다. 오롯이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방해요소가 적지 않은 이 전시 공간에서 하나 더 특기할 점은 40년대에 지은 낡은 여관 공간과 세 작가의 사진이 서로의 기운을 나눠 쇠잔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더욱 강력한 힘으로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특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상보적 관계처럼 느껴졌다.

필자는 이번 전시의 세 작가, 한수진, 홍희라, 정지윤의 사진을 모두 넓은 의미의 ‘포트레이트’로 보고 전시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왕과 유명 인사의 초상사진부터 이민자의 생활 모습을 담은 사진, 특정 시기 특정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국제결혼을 한 부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 동시대 젊은 사람들을 담은 사진, 유형학적 계보의 사진 등 포트레이트의 역사는 사진의 역사와 비등하게 길고, 다양하다. 한수진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 시리즈 〈3호선〉을 선보인다. 우연찮게 세검정, 종로, 일산 등 3호선이 지나는 지역에서 거주한 그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3호선 인근을 담았다. 모두 인물 사진이다. 그는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피사체가 서서 무표정한 표정을 지을 때 대형 카메라로 순간의 모습을 담았다. 3호선 어느 역에서 이제 막 내린 사람, 지하철을 타러가던 중 벽 앞에 선 사람 등이다. 그렇게 만든 포트레이트를 같은 크기로 인화하고 사진의 네 면을 두껍게 매트로 두른 후 얇은 테두리의 액자를 했다. 인물의 겉모습 외에 어떠한 특성도 드러나지 않은 채 익명으로 처리된 그의 3호선 포트레이트는 급변하는 지축역의 개발을 바라보는 소회라든지, 3호선을 지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라든지 하는 특정 주제로 묶이지 않는다. 그는 그 사진들을 〈3호선〉이라는 제목으로서만 명명하며, 피사체의 구체성이나 사진의 순간성, 사회적 맥락 등 어느 것도 강조하지 않고, 멀고 가볍게 인물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즉 자신의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담아낸다.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인물을, 자신의 기억에 있을법한 인물의 모습을 저장하듯 만들어낸다. 그의 사진에서 ‘사적임’은 피사체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다.

* 나머지 내용은 본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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