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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EXHIBITION

기억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글 권태현

《윤지원: 여름의 아홉 날》 | 9.6~10.6 | 시청각

《여름의 아홉 날》 전시 전경, 사진: 김상태, 이미지 제공: 시청각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일은 기억의 작업이다. 눈으로 봤거나, 귀로 들었거나, 몸으로 감각했던 것들을 글로 옮기는 일은 시차 속에서 이루어진다. 글감은 과거의 것이지만, 기억과 글쓰기는 지금의 일이다. 가끔은 전시장에서 남겼던 메모나 찍었던 사진을 꺼내보기도 한다. 과거와 연결된 텍스트나 이미지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볼 수 있게 하지만, 그것을 꺼내 보는 행위 또한 현재의 성좌 속에서 이뤄지는 작업이다. 사실 과거를 얼마나 생생하게 가지고 오는가의 문제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어떻게 기억해내는가의 문제이다. 기억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윤지원의 영화 〈여름의 아홉 날〉을 전시로 펼쳐 보인 《여름의 아홉 날》에 대한 이야기를 지면에 옮기는 지금의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이 과정을 상술하며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그 전시를 구성한 이미지들이 기억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의 아홉 날’이란 1996년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연결된다. 그해 여름, 민족해방계열 운동권들의 연례행사인 ‘범민족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연세대학교에 모여들었다. 정권은 경찰을 통해 학교를 원천 봉쇄하였고, 9일간의 투쟁이 이어졌다. 수백 명이 다쳤고, 수천 명이 잡혀갔다. 학생 한 명은 뇌사에 빠졌고, 경찰 한 명은 목숨을 잃었다.

 

《여름의 아홉 날》은 그 사건을 주제로 삼지만, 전시장에 흩어져 있는 이미지들은 그때의 일을 상세하게 복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물론 윤지원이 찾아낸 푸티지(footage)들을 통해서 당시의 이미지들을 볼 수 있지만, 영상들은 그 문제를 논리적이고 선형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AP통신이나 MBC의 뉴스 푸티지를 통해서 당시 그 사건의 모습이 어떻게 담겼고, 어떤 말들로 전해졌는지를 파편적으로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그것은 윤지원의 작업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외국어(아마 광둥어로 추정되는) 화자가 현재 시점에서 하는 말들과 겹쳐져 있다. 과거는 현재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프리즘들을 통해 산란된다. 과거의 이미지들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사건 자체보다 지금은 그것이 어떻게 매개되어 있는지의 문제이다.

 

특히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1996년 연세대학교 관련 영상을 담아내는 장면은 특기할만하다. 작가는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그 영상을 유튜브의 인터페이스 그대로 작업에 가지고 왔다. ‘좋아요’와 ‘싫어요’ 버튼, 조회수, 마우스 커서도 보이고, 웹페이지의 스크롤이 내려가며 영상에 달려있는 댓글까지 화면에 들어온다. 그것은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재에 뒤섞여 있는 과거를 발굴하는 과정 그 자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영상들은 1996년의 사건을 중심에 놓고 있으면서도 같은 공간의 현재 모습을 더욱 많이 보여준다. 지금을 담고 있는 고화질의 매끈한 영상과 거친 질감의 파운드 푸티지들이 교차되고 뒤섞이면서 의외의 공명들을 계속해 만들어 낸다. 그 울림 속에서 과거에 잠재되어 있는 지금의 모습이, 현재에 파묻혀 있는 과거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나의 영화가 전시장 곳곳 9개의 영상으로 흩어져 있는 것도 기억의 문제와 연결된다. 각각의 모니터에서 무한한 루프로 돌아가는 영상을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접하며 제각기 다른 방식의 몽타주를 구성하게 되는 것은 기억의 작동과 닮아 있다. 기억은 순서도 없고, 기억의 주인도 기억을 통제할 수 없다. 여기에서 몽타주는 이미지의 연결과 충돌을 넘어, 몸을 움직이는 감각과 건축적 경험, 그리고 기억이 더해지며 입체적으로 튀어 오른다. 다른 화면의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담아낸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사후적으로 접붙는 것이다. 예컨대 ‘고동치는 민족의 맥박’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이 달린 곳에서 일하는 비운동권 총학생회 집행부의 모습과 ‘연세대학교총여학생회’라는 글자가 새겨진 분홍색 현판을 떼어내어 단체 사진을 찍는 마지막 총여학생회 집행부원들의 모습이 현판의 이미지를 축으로 기억 속에서 묘하게 겹쳐진다.

 

이미지는 하나의 시간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 열려있다. 유의미한 기억의 실천들을 통해 잠시 멈추어 의미의 매듭이 만들어질 뿐이다. 그 과정은 정치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1980년 광주의 이미지들을 기억해내려는 실천들이 1987년의 혁명으로 번져나가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를 기억하는 작업은 이제 너무도 쉽게 제도와 자본, 권력에 전유되어 버린다. 그 혁명은 지금의 체제를 만들었고, 그때의 저항 세력은 이제 완전한 기득권이 되었다. 새로운 기억의 실천들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기에 1996년 여름의 연세대학교를 기억하는 윤지원의 작업은 정치적으로도 유의미하다. 학계에서도 연세대학교 사태를 87체제 이후의 새로운 국면을 드러내는 분기점으로 설정하는 연구들이 시작되고 있다. 

 

윤지원은 전시에 붙은 글에서 기시감을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것은 본적이 없음에도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을 말한다. 기시감을 기억과 연결하면 없었던 일을 기억해내는 작업이 된다. 여기에서 기억과 기시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픽션적 도약을 생각해볼 수 있다. 결코 일어난 적 없는 과거를 기억하는 지금의 실천들을 상상해보자.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건을 나의 것으로 기억해내는 것, 과거의 실패한 혁명적 운동들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다시 사유하는 것, 혹은 아직도 어딘가에 걸려있는 이한열의 모습을 담은 판화에서 1987년과는 다른 방식의 정치를 발굴하는 것. 나아가 강남역에서, 혜화역에서, 또 다른 광장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혁명가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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