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TOP

MONTHLY FOCUS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발견한 유토피아

글 김정아

《현대차 시리즈 2015 : 안규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전시전경“결국 사랑인가?” 마치 아름다운 탄식처럼 느껴지는 이 말은 이번 전시의 작가노트에 쓰인 첫 문장이었다. 지난 35년여 간을 미술가로 살아왔지만 안규철 작가의 이름 앞에 붙곤 했던 ‘생각하는 조각가, ‘사물들의 통역가’ 등의 수식어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화두와는 거리가 먼 것 들이었다. 1980년대 중반 부조리한 사회와 미술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형조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안규철 작가는 1990년대에 개념적인 오브제와 텍스트 작업으로, 2000년대 이후에 건축적 규모의 설치 작업과 공공미술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비판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동시대 미술의 대안적 가능성을 일관되게 모색해왔다. 그런데 그 긴 시간들을 보내고 이제야 고백한 사랑은 영원할 것 같지 않고, 심지어 보이지도 않는 것이었다. 마종기(1939~)시인의 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 지성, 1980)를 인용한 전시의 제목은 ‘지금 여기’에 부재(不在)하는 것들의 빈자리를 드러내고,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사라져버린 것들의 이름을 불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 발길에 치이는 게 또 입술에 발린 게 모두 사랑인 이곳에서 작가가 말하는 또 다른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 글은 그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의 여정을 위한 ‘보이는’ 나침반이 되고자 한다.


언어가 된 사물

미술이 감각의 차원을 초월하여 우리의 눈과 손에서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 속에서 이해되는 물질이자 언어가 되려는 것이 어찌 보면 현대미술의 주된 방향이자 활로가 된 것 같다. 이른바 개념미술이라는 범주로 분류되는 작품들은 그것을 서로 소통하고 작용하는 하나의 언어이자 기호로 전환시킨다. 특히 사물에 대해 즉물적이고 재현적인 접근에 민감한 조각의 경우, 이런 사물과 언어라는 두 관계항의 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지독히 물질적이고, 지독히 시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안규철 작가의 주된 관심사는 ‘예술가가 어떻게 이 언어의 순수성을 회복시키느냐’인 듯하다. 그는 사물의 언어 속에는 고스란히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있다고 보았고,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사물을 만든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그 텍스트를 새롭게 변형하고 조립함으로써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토대로 일상적인 사물들을 다루는 ‘오브제 조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안규철 작가는 1992년 첫 개인전 이후 한발 더 나아가 서술적인 텍스트와 오브제를 연결한 작업을 선보이게 된다. 이는 서술에 대한 금기에 도전한 셈인데, 여기서 이야기는 일종의 보조 장치로서 그 안에 배치되어 있는 여러 가지 의미의 층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보이지 않는 진실과 보이는 사물 사이의 대립 관계로,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그가 제시하는 언어적 공간에서 사물들은 상호 반향하는 명증한 구조를 이루기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서로를 배반한다. 다시 말해 그들 사이의 모순과 이질성을 그대로 병치하는 것이다.

《현대차 시리즈 2015 : 안규철–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전시전경

내러티브가 시각화될 때

‘어떤 물질을 이용해 어떤 조각이 만들어질 것인가’라는 미술의 낡은 질문은 이제 조각이 가지고 있던 물질의 무게를 내려놓고, ‘어떤 조건 속에서 무엇이 실현될 수 있을까’라는 대(大)명제로 전환되었다.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한 개념의 여정은 매일 아침 작가의 손끝을 기다리는 연필에 의해 쓰이고 그려지는 것들로 시작된다. 전시장에 놓인 모든 작품들은 그 스케치들의 최종 구현물이다. 모든 작품은 하나하나가 도전이고 모험인데, 그것은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 다만 안규철 작가는 미술 작품이라는 물고기를 키우는 그의 저수지에 계속 신선한 물과 양분을 공급하는 일에 한결같은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공책과 연필, 지우개는 늘 작업의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상구이자 은신처가 된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제 5전시실에 설치된 8개의 작품들은 안규철 작가의 예술 세계를 총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대표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은 <아홉 마리 금붕어>이다. 연못 속 아홉 마리 금붕어가 9개의 동심원으로 구획된 각자의 공간 속에 고립되어 있어 무심한 아름다움과 절대적 고독이 교차하는 역설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독과 격리라는 테마는 이번 전시 공간의 중심적 특성으로 작용한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맴돌고 있는 금붕어들을 통해 전시장 입구부터 관객들에게 피할 수 없는 묵언수행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90년대 초까지 안규철 작가는 세계의 부조리와 남들의 불운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자 존재 이유라고 여겼다. 당시 독일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한국 시위 현장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불편함은 초기 작업의 어둡고 우울한 정조(情調)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1991년 <먼 곳의 물>이라는 작품에서 아홉 마리 금붕어를 수놓을 때 비로소 이 짐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 번째 작품 <피아니스트와 조율사>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와서 같은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있고, 조율사가 매일 피아노의 해머 하나씩을 빼감으로써 연주가 조금씩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진행형 작품이다. 피아노 건반 해머가 하나씩 사라지면서 소리 없는 피아노 연주곡이 탄생한다. 소멸과 동시에 창조를 보여주는 셈이다. 음악과 침묵이 펼치는 2중주는 현실적 기능의 소멸을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다른 희망과 꿈을 제안하는 듯하다. 안규철 작가의 작업 세계에서 밖으로 밀려나기 직전에 있는 사물들은 이렇게 다시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세 번째 작품 <1000명의 책>과 여섯 번째 작품 <기억의 벽>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작업으로, 익명의 개인들이 공동의 일에 참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관객들이 채워 나가야 할 빈칸이 가득한 이번 전시는 완성의 단계를 열린 형태로 둠으로써 작가와 관객뿐만 아니라, 5개월 여간 전시장을 찾는 관객들 간의 보이지 않는 연대를 형성한다. <1000명의 책>은 1000명의 관객이 전시 기간 동안 국내외 문학작품을 연이어 필사하는 필경(筆耕) 작업으로, 손 글씨로 완성된 필사본은 전시가 끝난 뒤 한정판으로 복제되어 참가자들에게 배포된다. 작가는 유년 시절 아버지의 필사(筆寫)하는 모습이 뚜렷이 기억에 남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과 그림에는 유독 책상이 자주 등장한다. 그에게 책상이란 암담한 세상과 마주 대하는 공간이자, 반복되는 지루한 노동의 도구이며, 타인의 눈을 피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은밀한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에게 글쓰기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선택된 노동으로 보인다. <기억의 벽>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 그리워하는 것, 부재하는 것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벽이다. 벽은 전시기간 동안 계속 변화하면서 카드섹션과 비슷한 방식으로 시 한 구절을 조금씩 드러냄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느린 애니메이션이 된다. 전시 종료 후 이렇게 모인 수만 개의 단어를 정리해 ‘사라진 것들의 책’을 만듦으로써 작품이 완성된다. 안규철 작가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고 사물이 “떠났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사라진 모든 것들은 그를 떠난 것이고, 그의 입장에서는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무언가가 그를 떠나는 것, 원치 않게 헤어지는 것, 그래서 사실은 버림받은 것에 대한 슬픔과 허망함은 그가 오랜 기간 쌓아온 글 속에서 부단히 드러난다. 그를 버린 것은 우산처럼 사소한 물건만이 아닌, 사람 그리고 어떤 종류의 예술도 해당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애도와 자기 연민으로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글을 쓰고 사물을 만들어내는 안규철 작가의 노동은 그를 버린 것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를 채워보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안규철, 〈1000명의 책〉(내부), 2015

네 번째 작품 <식물의 시간>은 공중으로 올려진 15개의 화분이 움직이는 조각을 이루고 있다. 서로의 무게와 위치에 의해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 식물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움직임 속에 있다. 하나는 정해진 높이에서 궤도를 회전하는 수평적인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느린 성장을 계속 하는 수직적인 움직임이다. 안규철 작가의 사물들은 이렇게 평균을 위한 노력을 통해 그 차이와 이질성을 수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수평을 향한 모든 행위들이 공허하고 독재적인 세상의 풍경이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일곱 번째 작품 <사물의 뒷모습>의 7개의 영상에서는 세상의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사물과 사람이 등장한다. 안규철 작가는 늘 사물들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해 왔는데,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면서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 존재를 인식조차 못하는 사물들에게 자리를 내어 준 것이다. 작가는 모자, 손수건, 공, 자전거와 같은 오브제를 통해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이미지의 감각적 자극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생각을 들추어냄으로써 끊임없이 ‘보이는 것(예술 작품)'을 의심한다. 다섯 번째 작품 <64개의 방>은 보는 감상에서 경험하는 공간으로의 전이를 보여준다. 부드럽지만 무거운 검푸른 벨벳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닷속처럼 어둡게 가라앉은 고요한 공간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이는 관객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 물리적인 공간을 실제로 느끼면서 작가가 제시한 현실과 자신의 현실을 중첩시키게 하는 연극적 장치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이 작품의 의미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 된다. 전시의 마지막 장면을 이루는 공간인 <침묵의 방>에서 마침내 관객은 무한한 허공에 던져진다. 35톤에 육박한 철골과 시멘트로 제작된 거대한 둥근 공 모양의 구조물은 그 내부가 텅 비어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사물들, 수많은 언어와 이미지들이 모두 사라진 공간이 바로 그 곳이었다. 공허와 침묵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방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이것이 맞는가, 이대로도 좋은가, 아니 이것 아닌 다른 것은 진정 없는가? 라고…. 이 질문은 대안과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며 ‘지금 여기’가 아닌 곳, 그러니까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이 방에서 “부재하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형상으로 만들고 사람들의 생각 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비어있는 하나의 방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이 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했던 작가의 말 또한 듣는다.

“당신 미술에는 왜 색채가 없는가?”라는 질문에 요셉 보이스는 자기가 무채색의 그림을 그려야 당신들이 그걸 보고 거기에 결여되어 있는 색깔을 생각해낼 것 아니냐고 답했다. 안규철 작가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는 허공이 존재하기에 그 빈 공간을 채울 다른 것들이 생각났고, 그것은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굳이 그것이 사랑이 아니어도 무관할 것 같다. 작가의 작년 전시 제목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 사랑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All And But Nothing)’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THIS DIRECTORY

THIS 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