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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자의 회화: 순수로의 진화

글 박정원

손문자, 〈Life among Tree〉, 캔버스에 유채, 130.3x194cm, 2015

손문자(孫文子, 1942~) 작가의 개인전이 11년 만에 열린다. 이번 개인전은 1996년부터 올해 작업한 작품 모두를 볼 수 있는 전시이다.(11.10~11.17/ 갤러리 미술세계 제1·2전시장) 지난 50여 년의 화업을 쌓는 동안 그는 참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손문자 작가의 작품은 화면 가득 꽃이 가득하다. 캔버스에 피어난 다양한 형상과 색채의 풍요로움 만큼이나 현재 그는 작품세계의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맞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꽃을 중심 소재와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손문자 작가의 꽃이 남다른 이유는 작품 전체의 변천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손문자 작가가 제작한 수많은 작품 속에 존재하는 형태와 색채의 변주를 보고 있자면, 연대별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현대적인 감각으로 인한 생동감이 넘쳐난다. 그래서 그동안 작품에서의 변화무쌍한 형상과 색채의 향연은 변화의 지점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손문자 작가의 작품을 연대별로 구분했을 때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의 전작을 이해하는 과정은 다양한 사조로 이어지는 회화라는 장르를 이해하는 여정과도 비슷하다.

 

손문자 작가의 최근작 〈Life among Tree〉를 보면 꽃을 소재로 다양한 식물과 꽃들을 드로잉과 색면으로 표현하고, 최소 5가지 색채(초록, 파랑, 분홍, 흰색, 빨강 등)가 다양한 채도의 스펙트럼 안에서 이상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유기적인 구조를 보인다. 이 작품은 마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쳐 성장한 전인격적인 인간의 모습처럼 다양한 형태와 색의 요소들이 모여 이상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붉은 색과 푸른 색 계열의 보색으로 대비되는 색의 범주를 넓게 설정하여, 그 사이에 있는 다양한 색감을 선과 면에 적절히 적용하고 있다. 또한 마티에르가 느껴지는 촉감적인 면과 단순한 색면의 이질적인 조화는 시각 이상의 감각을 일깨운다.

최근 그의 작품에서 꽃과 함께 물고기와 고양이 등 새로운 소재가 등장했다. 꽃이 흐드러진 식물들 사이를 헤치며 유영하는 물고기들과 고양이를 감싸듯 우거진 식물의 잎들은 마치 편안히 보호받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그의 일상 속 풍경은 화폭에서 진정 자유의 모습으로 남는다. 손문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꽃은 세상이요, 물고기는 인간”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설정은 그의 그리스도교 사상과 신앙심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 내면의 풍경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에 대한 작가의 단상을 표현한 것이기에 더욱 의미 있다.

손문자 작가의 꽃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꽃의 형태에 치중하지 않고, 꽃을 모티프로 세상, 삶, 천상 등 다양한 추상적 의미와 개념을 담은 심상이 ‘꽃’으로 귀결되고 있다는데 있다. 그의 작품에서 꽃은 식물의 생태주기에서 가장 화려한 꽃의 보편적인 아름다운 형태미뿐만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지향하는 어떤 것을 반영하는 기의로서 존재한다. 작가가 꽃의 독창적인 면모를 재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형태구성과 색채를 직관적으로 선택해 나가는 타고난 예술적 감각에 기인한다. 색채의 변주와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는 무아(無我)의 세계는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맑고 고유한 감성을 담아냄으로써 오롯이 손문자라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전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정적인 식물 사이로 물고기의 움직임이 깃들면서 평면회화에서 보기 힘든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꽃의 형상과 색채로 분할되는 수직·수평·사선 구도 등의 과감한 직선 구도는 자유로운 드로잉과 탁월한 주조색과 대비되며 풍부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손문자, 〈Suvival: Lily Fanfare〉, 캔버스에 유채, 130x194cm, 2015

작품 〈Survival: Lily Fanfare〉는 가운데 진분홍 색면을 넓게 수직으로 배치하여 꽃잎과 중첩시켰다. 이것은 회화가 색과 화면 분할 등의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장치를 통해 시각예술로서 확장 가능한 공간을 열어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조한다.

이렇게 손문자 작가는 전적으로 색채를 사용하여 원근법과 명암을 유도하는 미감을 가지고 있다. 노란색과 푸른색, 녹색과 붉은색 계열의 보색 대비는 다양한 형태와 기법을 적용시켜 변천해 왔다. 화면에 깃든 공간감의 또 다른 비결은 질감에 있다. 이번 신작 중 소품 〈Oriental Orchid〉 시리즈는 평소 그가 즐겨 키우고 있는 난초(蘭草)가 소재가 된다. 과거 난초는 문인화와 한국화의 기초 덕목일 정도로 한 획으로 완성되는 심플한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미학을 내재하고 있다. 유화로 그린 난초의 전면 모습은 제소, 모래, 물감을 섞은 질박한 촉감을 더함으로써 다소 단순해질 수 있는 형태를 상쇄시킨다. 그리고 색면을 감싸고 있는 선 드로잉은 색의 부재를 가정했을 때 드로잉만으로 충분히 독립적인 작품이 된다.

이번 신작 〈Survival〉 시리즈를 통해 살펴본 색채와 형상 그리고 화면 분할 등으로 추릴 수 있는 작품의 특징은 손문자 작가의 작품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통합적인 단서가 된다.

 

〈Survival〉(2015) 시리즈를 시작으로 그의 전작을 귀납적으로 거슬러 보게 되면, 사실주의에 근거하여 재해석한 조형감각을 엿볼 수 있다. 손문자 작가는 1978년 선화랑에서 첫 개인전에서 도자를 선보였다. 그 도자의 특징은 흥미롭게도 도자의 표면에 훈민정음체를 모티프로 하여 디자인 하였다. 좁은 호와 고운 능선은 그의 섬세한 감각을 엿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손문자 작가는 1970년대 일중 김충현 선생을 사사하며 10여 년간 서예에 매진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특히 손문자 작가의 회화 작업에서 일관적으로 느껴지는 힘있는 선과 직관적인 붓놀림 역시 서예로부터 닦은 기량이 뒷받침 되었으리라. 그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이화여자중학교 장운상 미술 선생과 이화여고 문미애 선생과 김병기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예술가의 길로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졸업 이후 현 엘지애드(당시 금성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기량을 발휘했다. 이 경험들은 손문자 작가의 회화가 회화 장르 안에서 얻을 수 없는 아이디어를 직접 체득함으로써 독창적인 작품을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인지 손문자 스스로 미술 사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고, 타장르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다.

손문자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장르에 대한 선택을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로 작업환경과 여건이 작용했다. 1970~80년대 도자 작업을 할 당시 가마가 있는 경기도 이천에 매일 출퇴근 하다시피 다녔지만, 여건상 도자 작업을 지속시킬 수 없어 자택에 작업실을 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993년 강남예맥화랑에서 개최된 첫 회화전은 놀랍게도 대성공이었다. 작품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렸고, 작품에 대한 애호층도 생겨났다. 이 전시를 발판삼아 파리에서의 1여 년을 열정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손문자, 〈Composition-석양에 앉아〉, 캔버스에 유채, 1995    손문자, 〈The Way〉, 캔버스에 유채, 45x53cm, 2000

 

 

 

 

 

 

 

 

 

 

 

손문자 작가는 1994년 파리 체류를 기점으로 디자인적 감각을 반영한 화면 분할을 처음 시도하였다.

파리에서 제작한 작품들은 꽃이 등장하는 신작과 환연히 구분되고 파리 시대 이전의 정물 및 풍경 작품과 대조된다. 당시 작품의 주 소재는 여체(女體) 누드였다. 파리에서 머무른 1년 여간 그랑쇼미에르 아카데미(Acadmie de la Grande Chaumire)에서 수학하면서 손문자 작가는 온전히 누드 드로잉과 인체작업에 매진했다. 이 작업들을 1994년 파리 현지에서 《파리 르 살롱전》과 《파리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으며, 파리 피압장모네 화랑에서 제6회 개인전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당시 화면 분할기법과 색면에 정확하게 지정된 색의 대비를 통해 제작된 화면은 미술사조의 입체주의를 적용하여 파편적으로 연결시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작업과정과 회화로의 접근 방법을 살펴본다면, 1994년 당시 발현된 필치를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 같다. 손문자 작가가 파리로 떠날 당시에는 화가로서의 정체성과 필치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수많은 캔버스를 들고 파리에 도착해 그림만 그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조형성이 발현되었다.

실제 여자 누드 모델을 보고 그린 그림은 인물과 배경을 마치 색종이를 찢어 섬세하게 콜라주 한 듯한 질감이 특징이다. 손문자 작가는 색면의 실루엣과 대비되는 보색을 사용하여 선으로 테두리를 침으로써 독특한 미감을 뽐냈다. 당시 구상과 추상이 혼재된 화면 분할 기법은 정제된 입체주의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이 가지는 정체성은 역시 색이 완성한다. 그의 색에 대한 스펙트럼은 1990년대 인체 작업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지금의 꽃 그림은 다양한 색을 분사하듯 산발적으로 쓰되 그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대비되어 1990년대는 면으로 나뉜 인체와 배경 형상에 색을 지정하여 정확하게 화면에 칠하는 식이다. 원색과 보색에 의한 대비는 화면이 중첩되는 부분이 감각적인 패턴이 되어 보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귀국 후의 1996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들을 보면, 파리에서의 단순한 화면 분할과 달리 원, 삼각형, 사각형 등 기본 도형으로 구성된 인체 및 군상의 전체적인 형상이 좀 더 많이 분할되고 중첩되되는 등 자유자제로 형태가 변주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원색의 오방색을 사용한 색면과 질박한 질감이 어우러진 가족 공동체를 표현한 군상 작업 시리즈는 점차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파리에서 〈Composition〉 시리즈로 시작된 보색대비의 화면분할 기법은 이후 〈The Way〉와 〈Happy Days〉 시리즈로 변천되었다.

 

손문자 작가의 대표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꽃이 등장하는 그림은 2004년 그의 색채 감각을 일찍이 알아본 한 미술기관으로부터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색과 면의 조합으로 인한 정적이고 이성적인 그의 작품이 꽃을 통해 해체되고 자유로운 느낌의 율동감을 얻게 된다. 인체에서 꽃으로 소재가 전환되면서 전체적인 형상 또한 단숨에 변화하였다.

현재의 미술사조는 ‘주의(-ism)’라는 역사적 산물로 규정된 반면, 오늘날 미술사적으로 의미있는 당시 격변의 지점은 지금 화가들의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손문자 작가의 작품 전반에 걸쳐 확인되는, ‘인체에서 꽃으로의 소재 변화’와, ‘색면 분할에서 화면 기획을 통한 드로잉으로 전환’ 등 급진적인 변화의 지점처럼 말이다. 손문자 작가의 이러한 작품 경향은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이해하는 지표가 된다. 회화는 예술 장르 중에서 조형성과 색채를 기준으로 봤을 때 변화의 지점이 뚜렷하고 다양하다. 그래서 캔버스와 유화물감이 이룬 역사는 현재까지 다양한 미술사조로 존재한다. 손문자 작가의 작품에서도 두드러진 입체주의는 20세기 초 피카소와 브라크 등이 시도한 기법인데, 추상미술의 전신으로서 현대미술 전환기를 맞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회화에서 소위 ‘현대적’이란 표현은 독특한 관점과 독창적인 조형성이 기반이 되어 캔버스를 장악한다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역시 손문자 작가의 작품은 현대적으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손문자 작가의 작품을 어떤 사조와 연관시켜 바라보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의 작품세계 50여 년을 꿰뚫는 하나의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형상과 소재가 달라져도 한결같이 전해지는 순수한 조형감각은 그리스도교에 기초한 영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손문자 작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2명 이상의 가족 공동체 그림을 다수 제작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가정의 중심이 되는 성가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2002년 제12회 개인전 《The Way》은 성경의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을 상징화한 그림들로 구성된 것이다.

손문자 작가가 이번 전시 《서바이벌(Survival)》에서도 은유적으로 담고 있는 개념 역시 신앙과 맞닿은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다. 그래서 꽃과 물고기가 어우러진 이상적인 화면은 천상의 세계이자, 일상에서 끊임없이 좋은 것을 선택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손문자 작가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생애의 말년에도 예술가로서의 끈을 놓지 않았던 피카소와 마티스를 떠올리게 한다. 아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순수한 아이와 같이 그릴 수 있는 사람이란 진정 자유를 얻은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동양에서의 소박(素朴)함 역시 순수함이 깃든 정서를 일컫는다.

급변하는 현대미술 안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교육과 학습 또한 타인의 세계를 직·간접적인 답습할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이러한 환경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예술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구축한 사람일 것이다.

손문자 작가의 작품이 보는 회화를 넘어 공간감을 통한 철학적인 사유를 하게하는 이유 역시, 작업 이전에 선행되는 것이 신앙과 영성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많이 마음을 썼기 때문이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 것인가’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예술가들의 평생 동안의 화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손문자 작가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더 많다”며, “우주를 주관하는 분이 없다고 속단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태초의 역사를 믿는 것 뿐”이라 말한다.

손문자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삶과 일치하는 회화의 순수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나아가 내면의 감각을 깨우는 색채는 회화가 순수로 진화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손문자, 〈Garden of Camellia Flowers〉, 캔버스에 유채, 112x145.5cm, 2015

 

손문자 작가는 1942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962년 이화여고를 졸업하였다. 196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를 졸업하였으며 1994~95년 파리 그랑쇼미에르에서 수학하였다. 1978년 제1회 선화랑 개인전을 시작으로 하여 현재까지 총 16회 개인전을 가졌으며, 1994년 《파리 르 살롱전》과 《파리 앙데팡당전》을 비롯해, 독일 등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다수의 단체기획전에 초대되었다. 현재 소망교회, 연세대학교, 독일메픈시 시청, 베를린시 한인회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손문자 작가는 11년 만에 갤러리미술세계 1·2전시장(4,5층)에서 11월 10일부터 17일까지 미술세계초대기획전 《Survival》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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