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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홍성담 사건이 떠안긴 문화 무력주의

글 반이정

서울시립미술관 《예술가길드아트페어》 포스터지난 9월초 한 일간지의 기사와 칼럼의 맹공을 받은 어느 현대미술 작품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평소 만인의 관심에서 고립된 현대미술이 인구에 회자되는 건, 이런 선정적인 보도의 몫이다. 화제가 된 작품은 리퍼트 주한 미 대사 피습 사건을 소재로 삼은 그림으로, 언론 보도 직후 전시장에서 바로 철수 되었다. 문제작이 사라지자 논쟁도 흐지부지 종적을 감췄다. 전말은 이랬다. ‘예술가들의 창작 지원과 자생적 판로’를 만들기 위해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예술가 길드 아트페어- SeMA shot: 공허한 제국》(2015.9.4.~9.13 남서울 생활미술관)에 초대된 홍성담의 〈김기종의 칼질〉에 대해 『동아일보』가 “[단독]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에 걸린 ‘리퍼트 美대사 테러’ 옹호 그림”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붙여 내보냈다. 기사는 그림이 폭력을 일방적으로 미화한다고 단정했다. 그 보도가 나간 후 극우 성향 인터넷매체와 보수단체의 항의가 잇따르자, 서울시립미술관은 해당 작품을 철수한다는 설명 자료를 바로 배포했다. 현대미술이 세간의 주목을 끈 이 희귀한 소동으로부터 어떤 시사점을 찾아야할까.

 

기획의 윤리

“홍성담 작가의 작품 〈김기종의 칼질〉 한 점이 본 전시의 본질과 다르게 정치적 이슈화가 되고 본 전시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가의 자생성 문제라던가 시대정신의 재고찰 문제가 이데올로기화 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서둘러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24명의 다른 참여작가들과 작품들도 문제화되고 있는 작품 한 점으로부터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본 전시에 출품된 홍성담의〈김기종의 칼질〉 작품을 전시에서 내리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 전시를 맡은 홍경한 총감독이 작품 철수를 결정하게 된 사정이란다. 어떤 기획자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걸 사전에 인지하고 전시를 기획하지 않는다. 악의적인 언론 보도와 민원으로 억울한 처지에 내몰릴 걸 예측하고 전시를 기획하지도 않는다. 불평 섞인 민원과 편향된 언론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작품 철수로 대응한다면, 예술도 전시 기획도 설 자리를 잃는다. 더구나 서울시립미술관이 배포한 설명 자료와 홍성담의 인터뷰에 따르면, 문제가 된 작품은 총감독이 작가를 설득해서 받은 작품이다. 언론이 왜곡시킨 여론에 맞서기란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을 직접 고른 당사자로 작품을 끝까지 비호하는 게 맞다. 기획자는 자신의 기획 의도를 호도하는 언론과 민원에 맞서 출품작 선정이 왜 정당하며 오해가 무엇인지 이유를 들어서 맞서야 옳다. 설령 지는 싸움이어도 그래야 기획자의 명분과 윤리가 선다. 그렇지만 이번 소동에서 가장 큰 책임자는 불필요한 이념 논쟁을 이끌어서 기필코 작품 철수까지 이끈 본진이되,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언론일 것이다.

신문의 위기

2014년 구인구직 정보업체 '커리어캐스트'가 선정한 '10대 몰락 직종'을 미국 언론이 보도했다. 10대 몰락 직종 가운데 신문기자는 “온라인 및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영향력이 급속히 커진 영향 때문”에 몰락 직종 4위에 올랐다. 신문기자의 위상 하락을 예고하는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신문기자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허망한 권한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의기양양하게 ‘단독’보도를 낸 『동아일보』는 논설위원의 칼럼까지 더해서 전시를 맹공 했다. “홍성담의 그림 ‘김기종의 칼질’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예술로 봐줄 수가 없다.”고 해석한 칼럼에선 예의 전가의 보도인 ‘세금’까지 빼든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미술관에 테러를 미화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는 건 예술을 빙자한 또 다른 테러”라는 게 그 논설위원의 독특한 해석이다. 세금을 납부하는 모든 관객의 문화 수준과 안목이 동일할 순 없다. 현대미술은 만인의 취향을 고르게 만족시킬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금의 후원을 받는 현대미술이어도 만인의 기호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 불가피하다. 세금 운운하니까 되묻자. 가령 ‘단독’보도를 쓴 기자와 논설위원과는 반대되는 안목을 지닌 납세자들의 안목과 감상은 어떻게 보장받아야 할까? 홍성담 작품에서 한국 사회에 잠재된 이념 갈등을 심사숙고하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납세자들의 권리는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을까? 특정 성향의 언론과 시민의 감상 권리만 두둔한다면, 세금으로 지불되는 기획자와 총감독의 급여야말로 세금 낭비가 아닐까. 평소 미술관 근처에도 가지 않던 사람들이 ‘세금’ 운운하면서, 설익은 예술론을 설파하는 작태가 진짜 가관이다. 10대 몰락직종에 신문기자가 포함되었다는 기사를 인용하며 글을 열었다. ‘위기론’은 주기적인 화두다. 신문의 위기, 사법의 위기, 미술의 위기, 평론의 위기 등 단골로 불려나오는 위기론의 주역들도 많다. 그럼에도 이들은 보란 듯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시장에서 작품을 내쫓을 만큼 건재해 보인다. 그렇다면 신문의 위기란 허구일까? 그렇지 않다. 위기란, 제 구실을 못하고도 자리보전을 하는 존재에게, 월권행위를 자각 못하는 존재에게 어울리는 평가이니 말이다.

홍성담, 〈김기종의 칼질〉,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x130cm, 2015

근대 이전으로 후퇴한 현대 미술의 지위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 예술가는 아름다워야 한다.”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1975년 행한 작품 제목인데, 이 퍼포먼스는 작가가 빗으로 자신의 머리털을 과한 힘으로 빗어 내리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담는다. 예술이 미적 쾌감을 줘야한다는 세간의 고정관념을 반어적으로 돌려준 퍼포먼스다. 아름다움은 흔들리지 않는 예술의 미덕이다. 전위적인 동시대미술마저 조형적인 가치가 높은 때 가산점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미술의 존재감은 만인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묵인에서 온다. 이번 소동처럼 정치 성향이 다른 일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작품마저 제작되고 전시될 수 있는 배경은, 그런 공동체의 관대한 합의 때문에 가능한 거다. 일탈을 위한 해방구는 어느 사회에나 필요하다. 예술은 그런 일탈을 위해 열려있는 해방구다. 특정 관객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고작 미술품 한 점이 세상을 뒤집진 못한다. 제발 자중하자. 한국은 전국에서 현대미술의 최전선을 확인시키는 비엔날레 축제를 여러 지방자치에서 개최하는 나라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는 후진국 수준을 밑돈다. 공동체의 관대함이 낮은 게 원인이다. 아름답지 않은 작품에 불편을 느낀 일부 언론이 현대 미술의 자리를 근대 이전으로 내몬다. 그 점에서 이번 소동에서 고도의 정치적 속내를 숨긴 건 홍성담의 그림이 아니라, 작품을 과잉해석 하는 언론이다.

홍성담을 아트 스타로 만든 노이즈 마케팅

홍성담은 작가의 의중이야 어떻건, 반대자들의 노이즈 마케팅 때문에 항상 주목 받는 작가로 기억된다. 전시장을 찾지 않던 세상 사람들이 이런 보도 때문에 홍성담의 존재와 작품을 인지한다. 역설이다. 홍성담은 올해 작품 철수 소동에 앞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산부인과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한 박정희를 낳는 유신풍자화 〈골든 타임〉을 그려서 사회 이슈를 만들었고, 2014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출품한 〈세월오월〉이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묘사했다하여 다시 주목 받았다. 그 작품은 스스로 철수했고 그와 뜻을 같이한 출품 작가들이 작품을 연대 철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는 이번 〈김기종의 칼질〉 철수 소동까지 앞선 두 번의 소동 모두에서 홍성담을 두둔하는 글이나 인터뷰를 했다. 그러면 나는 홍성담의 미학에 공감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세월오월〉 철수 직후에 홍성담은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자신의 작품에 관한 장문의 해설을 기고했는데, 나는 그 글을 보고 작가가 제 작품을 장문으로 설명해야 한다면 굳이 작품을 제작할 필요가 있을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다. 또 이번에 문제가 된 〈김기종의 칼질〉처럼, 제목과 묘사를 직설법에 올인 시키는 미학을 평소 선호하지도 공감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미적 직설화법을 특정 화가가 고수한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우리 사회를 돌아봐야 한다. 그게 예술 감상과 평가의 정상성일 게다. 이번 홍성담의 작품 철수를 비판하면서, 내 비평적 취향까지 고백하게 만드는 이 사회 분위기가 진짜 싫다.

내막을 알 수 없는 비평

“감독선정위원회를 거쳐 선정한 총감독이 자체 권한으로 전시기획을 총괄하고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했고, 문제가 된 “〈김기종의 칼질〉 작품도 홍경한 총감독의 감독하에 선정·전시 됨.” 서울시립미술관이 배포한 설명 자료는 이렇게 말한다. 비평은 사태의 부분만 볼 수 있다. 사건을 보도한 언론도 부분만 보고 기사를 작성한다. 더욱이 어떤 언론을 보면 서울시가 ‘철거를 시킨 것’인양 보도하기도 했다. 총감독의 고유 권한 여부를 떠나, 언론의 악의적인 공세 앞에 외부에서 영입된 전시 총감독에게 직간접적인 회유가 설마 없었을까 싶다. 총감독만 질타하는 건 아마 공정하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평론과 언론은 공중에 노출된 부분을 토대로 논평을 내놓아야 한다. 총감독은 자기 권한으로는 작품 철수를 막기 힘든 분위기와 만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직위와 작품을 교환하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됐다. 이미 지는 싸움으로 내몰린 처지였기에, 오히려 직위를 내놓고 기획자의 명분을 지키는 편이 나았다. 의기양양한 단독보도로 ‘세금’ 운운하면서 기필코 작품을 내쫓은 언론에 대해선 어떤 대응이 가능할까? 답이 없다. 그런 보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소신을 지키는 납세자로 남는 밖에. 이번 소동은 작품 한 점을 미술관에서 철수시킨 단순한 문화계 소식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무력감을 입체적으로 맛보게 만들었다. 현대미술을 퇴행시킨 소동으로부터 한국 사회의 퇴행까지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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